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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또 다른 요인: 러시아 민주주의의 쇠퇴와 1993년 친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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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5-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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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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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으로서 러시아 민주주의의 쇠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3년이 지났다. 미국 주도로 휴전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아직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간 치열한 교전이 벌어지고 있다. 일종의 내전이면서 대리전이자 국제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에 관해 이미 다각도로 조명된 바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확장에 따른 지정학적 충돌, 민족주의 발전과 민족국가 형성의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의 서구적 정체성과 러시아적 정체성의 충돌, 러시아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대결,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이하 소련)의 영광을 되찾으려 하는 러시아 제국주의의 재림, 소련 붕괴 이후 세계 유일 패권국인 미국의 헤게모니 약화 등 다양한 원인이 제시되었다.  

한편 러시아 국내적인 요인에 주목한 이들은 장기집권을 위해 2020년 헌법을 개정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2024년 대선 승리를 다지기 위한 외부 위기 조성의 일환이었음을 강조한다. 이는 러시아 정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특수군사작전’(Spetsial’naia voennaia operatsiia)이라 부르면서도 ‘나치’의 침공을 운운하며 서구의 위협을 강조하고 있는 데서 잘 드러난다. 

푸틴 대통령이 87.4%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된 2024년 3월 대선은 당초 푸틴의 당선 여부를 떠나 출마 자체가 문제시되던 터였다. 4년 중임제 아래에서 2000년, 2004년 연거푸 대선에서 승리하며 정권을 장악한 푸틴 대통령은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을 앞세운 채 실세 총리로 국정을 운영한 뒤, 6년 중임제로 바뀐 2012년, 2018년 대선에서 당선되며 이미 20년이 넘도록 러시아를 통치해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2024년 임기 종료를 앞두고 2020년 개헌을 통해 2024년 대선에서 임기를 새롭게 ‘리셋’함으로써 3선 금지 요건을 회피했다. 이러한 ‘꼼수’에 수많은 러시아인이 민주화에 역행한다며 반대했다. 길거리 시위부터 언론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반대가 있었으나, 푸틴 대통령은 특유의 정치적 술수를 통해 반대 여론을 잠재우는 데 성공했다. 공교롭게 발생한 알렉세이 나발니 등 정적들의 ‘의문사’가 푸틴 대통령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던 것은 두말할 것도 없다. 여기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푸틴 대통령의 5번째 대통령 당선 가도의 가장 큰 공로자와 다름없었다. 법적으로는 푸틴 대통령이 2030년 대선에서 승리할 시 2036년까지 집권 가능하다. 헌법의 3선 금지 조항은 건드리지 않은 채 6선에 성공하는 셈이다.

이러한 푸틴의 정치적 승리는 러시아 민주주의 몰락을 상징한다. 하지만 필자는 반대로 러시아 민주주의의 쇠퇴가 푸틴 대통령의 정권 강화를 불러왔고, 그 결과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원인을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특히 푸틴이 전쟁 발발을 통해 얻은 국내적 이익을 생각하면 더욱 그러하다. 사실 이러한 견해는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이미 제기된 바 있다. 1991년 이후 옐친 정부와 푸틴 정부에서 요직을 맡았던 아나톨리 츄바이스는 200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여 러시아를 떠나 다른 나라에 정착한 러시아 지식인들중 한 명이다. 그는 푸틴 대통령이 전쟁을 일으킬 만큼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손에 쥐게 된 것을 경고했던 옛 옐친 정부 총리 예고르 가이다르와의 대화를 회상하며, “나는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가이다르와) 항상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보면 가이다르가 나보다 (푸틴 대통령의 권력 축적이 갖는) 전략적 위험에 대해 더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옳았고, 내가 틀렸던 것 같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러시아 민주주의의 쇠퇴가 시작되었던 것일까?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가 겪은 민주주의를 향한 길은 매우 길고 험난했다. 딱 한순간을 집어낼 수 없을 정도로 결정적인 기점이 다수 존재했다. 러시아 KGB 출신의 푸틴 대통령이 지닌 개인적 성향과 경험도 권력 집중을 낳은 가장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1993년 10월 당시 옐친 대통령의 친위 쿠데타는 제도적인 측면에서 러시아 대통령이 입법부 및 사법부에 대한 우위를 점하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1993년 러시아의 친위 쿠데타


시간을 되돌려 보면, 쿠데타가 발생한 1993년은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 해체 이후 등장한 러시아 연방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의 지도 아래 서구화 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이른바 ‘충격 요법(Shock Therapy)’이라는 단기간의 사회·경제 제도 개혁은 러시아 경제를 더욱 위기에 몰아넣었다. 소련 시대 공산·사회주의 제도와 관행에 익숙했던 러시아 국민은 이러한 단기간에 휘몰아치는 격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왕좌왕했다. 서구화 조치의 혼란 속에서 국민의 민생은 피폐해졌고 치안은 불안해졌다. 서구 국가를 모방하는 조치가 경제 및 민생 상황을 호전시킬 것이라는 정부의 약속은 현실에서 동떨어진 듯 보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친서구 개혁파를 비판하는 보수주의자들의 목소리가 커져갔다. 보수주의자들은 사실 하나의 집단을 보기는 어려웠다. 옛 소련 시절의 공산주의자들, 러시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유라시아주의자들, 민간보다는 국가가 경제를 주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자들(statist) 등 다양한 집단이 서구주의자들의 반대편에 서 있었다. 비록 이들은 서로 다른 정치적 지향점과 방법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추락한 러시아 국가의 위상을 다시 한번 세계 초강대국의 지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반서구주의 세력들이 결집한 곳은 의회, 즉 최고 소비에트(Supreme Soviet)였다. 1978년 소련 브레즈네프 정권하에서 채택된 소련 헌법을 기반으로 하는 최고 소비에트는 1990년 옐친을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대통령으로 임명함으로써 1991년 소련의 붕괴에 옐친 정부의 출범을 낳은 산실이었다. 친서구 정책에 따른 혼란과 민생의 악화 속에서 최고 소비에트는 정책의 전환을 요구했고 이를 거부한 옐친 대통령의 권력을 견제하고자 했다. 

결국 1993년 9월 21일 옐친 대통령은 포고령 1400을 발표하여 의회 해산을 선언하고 새로운 선거 일정을 공표했다. 그러자 최고 소비에트 측에서는 대통령의 법률 위반을 근거로 대통령 해임안을 통과시키고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새로운 국가수반으로 승인했다. 이러한 조치는 극심한 국론 분열과 국민적 갈등 양상을 초래했다. 길거리에서 양측 지지자들간 유혈 충돌이 일어났다. 특히 최고 소비에트 측에서는 무장 병력을 동원하여 비무장 경찰을 해산시키고, 국영 방송사를 습격하여 이를 일시 장악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93년 10월 4일 옐친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하여 의사당을 공격했고, 결국 무력으로 의회를 해산시키게 된다. 당시 탱크의 포격으로 국회의사당인 ‘하얀 건물(Belyi dom)’(영어로는 미국의 백악관과 같은 White House로 부름)에 화재가 발생하는 모습은 CNN으로 송출되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신구 이념 대결 양상과 대통령 권한 강화의 시작


이 사건은 당시에는 공산주의자(최고 소비에트) 대 민주주의자(옐친 정부)의 이념 대결로 표방되었다. 최고 소비에트는 세력을 결집하면서 인민 민주주의 공산 혁명을 상기시켰고, 옐친의 크레믈린은 반대로 공산주의 회귀에 따른 자유 상실 가능성을 언급하며 군중들을 자극했다. 한편 이러한 이념 대결은 당시 옐친 정부가 경제지원을 호소하던 서구 국가들에 반향을 일으켰다. 당초 미국은 쿠데타 전에는 ‘최고 소비에트’를 공산주의 시대의 ‘잔재’이자 민주주의를 ‘흉내내는 자’들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에 맞선 옐친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선출된 유일한 국가 지도자’로 부르며 그의 조치를 적극 지지했었다. 그러나 군대를 동원하여 의회를 해산시키는 초유의 사태를 두고 미국 정부조차 우려를 표명했고, 옐친 대통령은 의회 해산 이후 민주주의에 기반한 헌법 제정과 12월 총선을 약속하며 미국을 안심시켰다. 

   실제 1993년 12월 12일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새롭게 양원제 의회가 성립되었다. 개헌을 통해 ‘국가 두마(Gosudarstvennaia Duma)’라는 이름의 하원과 ‘연방평의회(Sovet Federatsii)’라는 이름의 상원이 구성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러시아의 헌법 개정이 실질적으로 대통령의 권한 강화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첫째로 대통령에 비해 의회의 힘이 예전보다 약화되었다. 상하 양원의 분할은 물리적인 건물 분리로 상징적으로 표현됐다. 미국이나 영국의 상·하원이 한 의사당을 사용하는 것과 달리 하원 ‘국가 두마’ 건물은 모스크바 중앙 마네즈나야 광장에 위치한 반면, 상원 ‘연방평의회’ 건물은 중심부에서 다소 떨어진 북부 지역에서 있어 물리적으로 구분된다. 둘째 지역구마다 선거로 대표를 선출하는 하원과 달리 각 지역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이 모인 상원은 지역 정치인들로 구성되어 집권당의 입김이 작용할 여지가 매우 컸다. 셋째 대통령의 탄핵이 매우 어려워졌다. 러시아의 탄핵 절차는 하원 2/3 찬성과 상원 2/3 찬성으로 미국의 하원 과반 찬성 및 상원 2/3 찬성보다 까다롭다. 

1993년 개헌 이후 대통령 권한에 대한 의회의 견제는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의회의 견제 없이 러시아 대통령직은 푸틴이라는 개성 강한 지도자를 통해 독재정에 가까운 모습을 띠게 되었다. 만약 옐친 대통령이 1993년 군 병력을 동원하여 당시 의회였던 ‘최고 소비에트’를 제압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옐친 대통령이 주장하듯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대신 소비에트 시기로 회귀하게 됐을까? 분명한 것은 역사적 현실은 각 개인, 개별 민족과 사회, 그리고 이웃 공동체 모두의 선택을 통해 빚어진다는 사실이다. ‘자유’를 지킨다는 미명하에 법치의 파괴를 선택한 러시아인들은 30년 후 ‘전쟁’과 ‘독재’를 마주하는 운명에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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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태(한림대 도헌학술원-러시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