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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으로서의 한강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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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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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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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은 한국문학이라는 공동영역(커먼즈)과 관계하는 모든 이들에게 반가운 선물이었다. 좁은 의미의 ‘문단’으로 보면, 그동안에도 대중문화 분야의 눈부신 한류 열풍이 알고 보면 문화의 품격을 면면히 떠받쳐 온 한국문학의 ‘음덕’에 힘입은 결과라는 주장은 있어 왔다. 하지만 이렇다 할 무게는 얻지 못했던 그런 주장 속의 ‘음덕’이 비로소 구체적 존재감을 얻게 된 점에서 이번 수상은 벅찬 일일 수밖에 없다. “한강의 이번 노벨상 수상은 고통과 수난의 치유자이며 해결자였던 한국인과 한국문학이 걸어온 길 위에서 거둔 빛나는 성과”라 한 황석영 작가의 축하 메시지에도 그와 같은 자긍심이 잘 표현되어 있거니와, 이 메시지가 한국문학과 함께 ‘한국인’을 호명한 점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한국문학이라는 공동영역의 구성원은 작가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문학을 읽는 독자이자 무엇보다 한국문학의 토대인 한국어를 함께 보존하고 일구는 이로서 문인이 아닌 한국인 역시 이 공동영역의 엄연한 참여자이다. 그 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인의 집단적 성과라 부를 수 있으며 또 바로 그렇기에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대체로 깊은 탄식을 자아내는 이즈음 한국인들이 겪는 자존감의 상처를 위무하는 사건이기도 하다. 

 이번 수상 소식을 듣고 느끼는 기쁨에는 어떤 안도감도 섞여 있다. 우선은 한국문학을 읽고 쓰는 대다수가 흔쾌히 수긍할 작가의 수상이었기 때문이다(어디나 이상한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라 터무니없는 ‘비문학적’ 시비가 없는 건 아니다). 중국의 찬쉐나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 다와다 요코 등이 주로 거론되면서 그의 수상을 점친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결과가 발표된 이후 ‘언젠가 받으리라 예상했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다’라는 반응이 대세가 될 만큼 많은 이들이 급속히 납득했고 그랬기에 높은 순도의 기쁨에 기꺼이 동참했다. 안도감의 또 다른 이유는 스웨덴 한림원의 선정 경위 설명 역시 흔쾌히 동의할 수 있을 만큼 적절했기 때문이다. “역사적 트라우마와 대면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는 문구는 한강의 주요작을 읽는 우리의 실감에 잘 조응했기에 수상 관련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거의 빠짐없이 인용되곤 했다. 다시 말해 합당한 작가가 합당한 이유로 선정되었다는 안도가 기쁨을 배가했던 것이다. 

 이는 한강의 작품이 이른바 오리엔털리즘 같은 서구 중심적 취향이나 오독이 개입될 여지없이 이미 세계문학의 당당한 일부로 자리 잡았음을 일러 준다. ‘보편적’ 기준이 적용된다고 말하면 그것대로 오해의 소지가 있겠지만 적어도 보편이 무엇인지를 둘러싼 경합의 장(場)에 한국문학이 떳떳하고 의젓하게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일국적 편협함을 넘어선 위대한 문학들의 교류라는 맑스적·괴테적 이상으로서든, 아니면 문학적 편견과 불평등이 작동하는 빠스깔 까자노바(Pascale Casanova)식 ‘세계문학공화국’으로서든, 오랫동안 세계문학은 어딘가 다른 곳에 존재하고 한국문학은 거기 속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고 여겨져 왔다. 하지만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이 확인해 주듯 이제는 한국문학이 갖는 세계문학적 면모가 어떤 것이고 또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또 한국문학이 그 일부가 된 세계문학에 어떤 변화와 차이를 만들고 있으며 또 만들어내야 하는가, 하는 질문들이 새로운 실감과 더불어 제기되기에 이르렀다.

 한강의 작품 가운데 현재 시점에서 세계문학 텍스트로 가장 확고히 자리 잡은 것은 아마도 『채식주의자』일 것이다. 일찍이 2016년 부커상 수상과 그에 이은 다양한 언어로의 번역과 판매, 세계 주요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각종 블로그에서 쏟아진 리뷰들이 그 점을 뒷받침하며 이런 현상은 앞으로 더욱 확대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학위논문을 비롯하여 『채식주의자』를 논한 학술저작 역시 적지 않으며, 그런 저작들에서 이 작품은 이미 세계문학의 ‘정전’으로 다루어진다. 『채식주의자』가 세계문학 독서시장만이 아니라 세계문학 연구영역에서도 주목받는 데는 강렬하고도 섬세한 이 작품의 감각적 흡인력에 더하여 주제 면에서도 맹렬한 현재성을 갖는다는 점이 작용한다. 오늘날 세력을 갖고 유통되는 이론적 프레임들과 접속하며 전 지구적 이슈를 둘러싼 주요 입장을 뒷받침하거나 반박하는 담론 자원으로 활발히 전유되는 것이다. 일단 세계적인 페미니즘 리부트 경향, 그 가운데서도 특히 (더욱 현재성이 강해지는) 에코페미니즘과 함께 논할 여지가 충분하고, 채식주의(및 음식과 거식증과 관련된 이론들)와 동물연구, 비판적 식물연구, 들뢰즈적 ‘되기’와 이어지는 포스트휴머니즘, 생명정치와 정동, 돌봄과 병리학 등 대강만 꼽아도 상당한 스펙트럼에 걸치는데, 이 소설이 2007년에 출간되었음을 감안하면 ‘전위성’을 말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당대적 주제와 접속면이 넓다는 점은 이 소설을 그 주제와 관련된 다른 작품들, 특히 세계문학 정전으로 확립된 다른 작품들과 연결하기 쉽다는 뜻도 된다. 이를테면 오비디우스로부터 시작된 ‘변신’ 모티프를 매개로 카프카와 나란히 놓을 수 있고, 예외적 인물이 구사하는 예외적 형태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멜빌의 바틀비에 비견될 수 있으며, 육식의 거부라는 측면에서 쿳시의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와 만날 수 있다. 페미니즘을 경유하면 말할 것도 없이 더 많은 작가와 작품들에 가닿는다. 이처럼 『채식주의자』는 문학적으로나 담론적으로 세계성을 확보한 다양한 주제들 그리고 세계문학으로 확립된 다양한 정전들과 이어지면서 해석의 충동을 촉발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존 논의의 프레임들이 순순히 작동하기는커녕 그것들의 한계를 시험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론적 층위에서 간단히 소비되거나 소진되지 않는다는 점 또한 세계문학으로서 『채식주의자』가 갖는 저력일 것이다.

 한편 앞서 언급한 한림원의 선정 경위를 들으며 많은 사람들이 먼저 떠올린 작품은 『소년이 온다』였을 법하다. ‘역사적 트라우마와의 대면’이 더할 수 없을 만큼 통렬히 이루어지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폭력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것이 이 작품이기 때문이다. 잔혹한 학살과 터무니없는 은폐가 있었고 한때 진상규명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왜곡의 표적이 되는, 우리에게 역사적 무게나 상흔의 깊이가 남다른 사건을 배경으로 하기에 한강의 노벨상 수상을 한층 뜻깊은 사건으로 만들어 준 것도 (『작별하지 않는다』와 더불어) 『소년이 온다』이다. 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 멤버인 안나-카린 팜(Anna-Karin Palm)은 한강 작품에 익숙지 않은 독자들에게 이 소설부터 시작하라고 권한 바 있는데, 특히 한국독자들 사이에서는 광주와의 전면적 대면이 불러일으킬 마음의 동요가 버거워 차마 시작하지 못하겠다는 반응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우리는 결국 그런 동요가 정확히 우리 마음의 깊은 요구라는 것, 그 동요야말로 우리 마음에 필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역사적 트라우마라는 표현은 트라우마를 발생시킨 사건이 역사적 성격을 갖는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트라우마 자체가 역사성을 띤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건을 겪은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겪지 않은 이들, 특히 후대까지 그 트라우마를 트라우마로 받아들이는 전승이 있어야 하고 그와 같은 전승에는 증언이라는 주제가 뒤따른다. 『소년이 온다』는 광주를 겪은 인물들의 내면에 오래 머물면서 각자에 고유한 고통의 경로를 극히 섬세하게 짚어가면서도 도대체 그런 고통을 증언하는 일이 가능한가를 묻고 또 묻는다. 또 동시에 그와 같은 증언 불가능성에도 사로잡히지 않은 채 증언을 위해 과감한 서사적 시도를 감행한다. 요컨대 광주의 고통을 증언하는 일이 가능하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어떻게 또 얼마나 가능하지 않은가를 탐문하는 과정을 그 자체로 격렬한 증언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렇듯 상반되는 움직임이 섬세하고도 첨예하게 맞부딪치며 광주와 그 트라우마는 거듭 살아나고, 이를 통해 역설적으로 우리는 트라우마조차 처참한 상처라는 단일한 겹이 아니라 우리를 어떤 ‘밝은 곳’으로 이끄는 잠재성이 있음을 깨닫는다.

 『소년이 온다』처럼 우리 역사에 깊이 뿌리박은 작품이 세계적 호소력을 갖는다는 사실은 글로벌과 로컬에 대한 여하한 고정관념을 흔든다. 한편으로 그것은 광주와 4.3 같은 폭력의 역사가 불행히도 세계 곳곳에서 벌어진 ‘보편적’ 사건임을 나타낸다. 한강 문학이 보여주듯이 그런 역사들이 남긴 인류 공통의 과제와 대면하려는 열의의 남다른 강렬도야말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이 갖는 특이성인지 모른다. 그렇게 한국문학은 이미 세계문학의 최전선에 있고 이번 노벨상 수상은 다만 이를 사후적으로 추인했을 따름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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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아(한림과학원 HK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