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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는 『채식주의자』의 영역(英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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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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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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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논할 때면 ‘번역은 반역’이란 말이 종종 거론된다. 이 문구는 번역의 엄연한 한계와 더불어 번역 작업의 지난함을 서늘하게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그 자체가 탁월한 번역의 예시이다. 이탈리아 속담 ‘Traduttore, traditore’(‘번역자는 반역자’라는 뜻으로 ‘트라두토레 트라디토레’로 발음된다)를 일본에서 옮긴 이 번역의 절묘함은 뜻/내용 번역에 더해 소리/형식의 번역까지 담아냈다는 점에 있다. 즉, 이탈리아어 두 낱말 간의 소리 유사성과 거기에 실린 운(韻)을 한자어 ‘번역(飜譯)/반역(反逆)’의 짝으로 멋들어지게 돌려서 포착했다. ‘어 해 다르고 아 해 다르다’는 우리네 속담이 떠오른다. 반면에, 영어 번역 “translator, traitor”는 어쩐지 되다 만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작가 한강에게 ‘부커상 인터내셔널’의 영예를 안겨 주고 뒤이어 노벨 문학상 수상에도 한몫했을 『채식주의자』의 영역본 The Vegetarian은 번역의 영광과 실패 가운데 어느 쪽일까? 

  필자는 2017년에 “『채식주의자』와 The Vegetarian: 원작과 번역의 경계”라는 제목의 논문을 쓴 적이 있다. 영역본의 오역 실상과 규모를 밝히는 데 집중한 글이었는데, 결론은 번역이 원작의 경계를 심히 벗어난 탈주병이나 성형물(成形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가 그 판단의 기준으로 삼은 대목을 옮겨 본다. “각기의 번역은 나름의 목표와 전략을 선택할 수 있고 또 경우에 따라 일정한 정도의 원문 변용은 불가피하거나 필히 요청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고려는 기본적으로 번역이 원작을 살리는 쪽으로, 즉 번역 독자의 원작 이해를 촉진하는 쪽으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때문에, 번역이 원작을 변형하거나 원작으로부터 이탈하는 데는 일정한 경계가 있다고 할 것인바, 원작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그 최소한의 경계가 될 것이다.”

  그 경계를 넘은 오역의 유형들을 간략하게 짚어본다. 첫째, 낱말의 뜻을 엉뚱하게 이해한 경우로, 춘화(春畫)는 ‘spring flower’(春花)가, 경기(驚氣)는 ‘game’(競技)이 되었다. 역자가 해당 대목의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둘째,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헛짚음으로써 그 관계 역학을 이해하는 데 심각한 혼란을 초래했다. 셋째, 한국어 구문에 흔한 생략된 주어를 파악하지 못한 결과 각 인물이나 인물들 사이의 섬세한 심리의 결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넷째, 번역에서 아예 누락된 대목이 너무 많았다. 그 빈도수는 3부작의 후반부로 갈수록 급증하는데, 누적된 오역들이 파탄에 이른 징표로 판단된다. 다섯째, 원작의 진지한 문제의식이 자의적으로 무참하게 왜곡되는데, 그 왜곡의 정점에 해당하는 사례는 아래에서 별도로 살핀다. 

  형부의 비디오 작업 중 영혜와 J의 교합 장면의 느낌이 ‘그로테스크’에서 ‘obscene (외설적)’으로 둔갑한다. 알다시피, 영혜의 채식은 가족을 비롯한 주위 사람들에게 가혹한 의혹과 비난의 대상이다. 특히 남편과 친정아버지는 채식을 비정상적이고 불온한 것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 즉 일종의 외설로까지 간주한다. 적어도 이 단계에서는 오직 형부만이 영혜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육식 거부로 여위어 가는 영혜의 몸과 거기 남은 몽고반점에서 얻은 영감을 예술로 형상화하려는데, 그런 그에게 꽃이 화사하게 그려진 교합 직전의 벌거벗은 남녀의 몸이 ‘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리고 문학 용어로서의 ‘그로테스크’는 익숙한 세계관을 뒤흔들고 전혀 다른 과격한 관점을 들이대는 데 특별한 쓰임새가 있는바, 영혜가 지향하고 형부가 탐구하는 ‘식물-인간’의 모습은 이런 그로테스크 특유의 의미를 구현하는 전형적 사례가 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을 육식에 기반한 동물로 여겨온 유구한 관점에 대해 식물로서의 인간형을 대립시켜 양자 간의 경계를 심문하고 종국에는 어둠과 폭력에 시달리는 인간의 현존재를 몽고반점으로 표상되는 인간의 시원적 본성과의 관계 속에서 비추어 보게 한다.

  이러한 사정은 2부의 끝에서 동생과 남편의 녹화된 성행위 장면을 본 엄청난 충격에 두 사람을 정신병원에 넣었던 인혜가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의 3부에서 “알몸으로 얽혀 있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리고도 “성적인 것으로 기억되지 않았다”고, “꽃과 잎사귀, 푸른 줄기들로 뒤덮인 그들의 몸은 마치 더 이상 사람이 아닌 듯 낯설었다”고, 그리고 “그들의 몸짓은 흡사 사람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고 술회하는 데서도 확인된다. 그러므로 역자가 ‘그로테스크’를 ‘외설’로 둔갑시킨 것은 영혜와 형부가 절망적 몸부림을 통해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해 준열하게 제기한 문제를 전면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원작과 번역의 경계를 생각하다 보면 『채식주의자』 자체가 그 실마리가 될 만한 여러 겹의 ‘경계’를 탐구한다는 점이 눈에 들어온다. 채식과 육식, 식물과 동물, 꿈과 현실, 예술과 외설, 삶과 죽음의 경계들이 제시되고, 인물들은 이 경계들의 양편으로 대치한 가운데 치열한 갈등의 드라마를 펼친다. 영혜의 남편이나 아버지처럼 경계의 이편을 옹골차게 견지하는 인물들이 있는가 하면 영혜와 형부는 어떤 경계들을 건너가 버림으로써 사회에서 유배되고 만다. 이런 대치와 갈등의 구도에서 경계를 가로지르는 변모를 겪는 인물은 인혜이다. 

  2부까지 경계의 이편에 서 있던 인혜는 3부에서 죽음을 향해 치닫는 영혜를 보살피는 가운데 무너져 내린 자기 삶을 앞에 두고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라는 물음을 자신에게 던지며 심원한 자기 성찰의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자 자신이 남편과 동생이 벌인 해괴한 사건의 피해자 또는 희생자라는 생각의 틀이 일거에 무너지고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그 같은 절망의 끝자락으로 몰아갔던 것은 아닌가 하는 감당하기 힘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성실의 화신과도 같았던 자신이, 타인에 대한 선의와 인내로 묵묵히 지탱해 온 자기 삶이 실은 비겁함과 사랑이 빠진 체념에 불과했음을 인지하는 충격은 대번에 그녀를 삶과 죽음의 경계로 끌고 간다. 이렇듯 자기 삶을 남편과 영혜의 삶에 포개어 봄으로써 제 마음의 밑자리를 또렷이 응시하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선 자기 실존을 자각하면서 인혜는 그들이 남긴 “진창의 삶”을, 그들이 건너가 버린 삶의 경계를 응시하고 숙고하는 가운데 마침내 타자로 자리매김되었던 영혜가 자신의 억눌리고 숨겨진 분신이라는 고통스러운 공감의 이해로 나아간다. 인혜가 영혜의 열망과 좌절을 껴안는 믿음직한 번역자로 떠오른다.

   스미스(Deborah Smith)의 The Vegetarian을 읽은 외국 독자의 반응은 어떨까? 영문학자 팀 팍스(Tim Parks)는 “원어를 모르는데 어떻게 번역을 평가할 수 있으며 번역을 평가할 수 없는데 어떻게 원작에 대한 의견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번역이 의심스러운 대목들을 두고 저자와 역자 중 어느 쪽을 탓해야 할지 모르는 영어권 독자의 곤혹스러움을 선명하게 대변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라는 인혜의 물음들이 스미스의 번역에 되먹여져야 하는 이유이다. 아울러, 인혜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그것을 남편과 영혜의 삶에 겹쳐 보았듯이 우리는 번역을 원작에 겹쳐 보아야 한다. 영혜와 인혜가 서로 간의 표면적 단절에도 불구하고 깊은 곳에서 순하게 포개어지듯 『채식주의자』와 The Vegetarian도 어느 정도 불가피한 표층의 변환에도 불구하고 저변에서는 가능한 대로 상호 밀착된 관계를 견지할 수 없었을까? 

  그러기에는 스미스가 원작에 대한 성실하고 눈 밝은 독자가 되는 데서부터 실패했다고 판단된다. 이 앞에서 자국화 전략에 따라 영어권 독서 대중에게 친숙한 번역을 

제공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식의 변명 혹은 옹호는 무력할 수밖에 없다. 역자는 원작을 설보았고 그 설익은 이해로 번역에 쉬이 달려들어 원작은 물론 영어권 독자도 배반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아니, 그에 앞서 역자의 한국어 실력이 『채식주의자』의 섬세한 시적 언어를 감당하기에는 태부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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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번 (한림대 영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