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와 자본, 기술을 공진화시키는 ‘복지자본주의’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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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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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영·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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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 그만해… 이러다가는 다 죽어…’
오징어 게임의 깐부 할아버지의 외침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를 두고 하는 말인가 싶다. 우리는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 57년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하게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가 되었다. 1인당 GDP가 60년대 100달러에서 현재 3만달러대로 300배가 넘게 성장했으니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역사와 문화의 저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오늘날 세계가 환호하는 K-팝, 드라마, 문화 등에 경이로움과 자부심을 느낀다.
그러나 그 성과를 얻기 위해 내준 것 또한 너무 많다. 저출산과 노인 자살 문제가 가장 뼈아프다. 이것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중 가장 안좋다. 저출산은 유전적 번식 본능조차 실제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함이며, 노인 자살은 장수 세상을 너무도 부실한 노후대책으로 진입한 결과이다. 인생의 처음과 끝이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점철되어 있음이 우리 사회의 민낯이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 명암의 정산이 아닐까 싶다. 한국의 초압축 경제 성장은 경제적 최선진국인 미국을 아낌없이 보고 배웠기 때문이다. 미국식 자본주의는 ‘전체는 부분의 합’이라는 환원적 사고에 기초해 분업과 전문화에 따른 경쟁 중시의 생산성 극대화를 근간으로 한다. 이와 함께 미국은 민간 비영리 주도로 공동체 의식 함양에도 엄청난 관심을 쏟고 있다. 우리는 이는 흡수하지 못했다.
우리의 근대는 타율에 의한 강점기와 해방을 통해, 또 식민의 잔재도 청산하지도 못한채 동족상잔까지 더해지면서 모든 물적, 정신적 가치가 무너진채 전개되었다. 특권과 차별의 시대라는 전근대를 청산하고 보편과 평등이라는 근대의 시대 정신을 스스로 형성하지 못함이 과거의 조급과 오늘의 불통과 분리를 낳아 공동체 파괴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공포를 느낄 정도로 공동체 소속과 존중 욕구가 방치되어 있다. 한국 사회의 격차 공포는 이성을 마비시켜 정신적 장애로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 과학 철학자 칼 포퍼(Karl Popper)가 주창한 건강한 개인과 사회의 필수템인 비판적 합리성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논의의 배경에 앞서 언급한 환원주의(reductionism)가 있다. 이는 과거 2500여년간 이어져 내려와 오늘날 서양 문화 전반의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환원주의는 전체를 부분의 합으로 이해한다. 그러기에 이성과 논리로 잘 분석(analysis)하면 불변의 본질을 찾을 수 있고 이로써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부분이 다시 전체로 환원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결정적이며 기계적 사고관이라 하겠다. 오늘날 경제, 사회, 환경을 분리하여 정책화함에 배경이 된다. 이에 반해 전일주의(holism)는 전체는 부분의 합 그 이상으로 보기에 부분으로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한다. 변화를 인정하기에 사물의 종합(synthesis)과 상생의 직관을 중시한다. 따라서 경제, 사회, 환경을 분리하여 접근할 수 없다는 비결정적이며 생태적 사고관이다.
우리는 사건(event)이라는 점(dot)을 통해 변화(문제)를 자각한다. 그 변화를 해결하기 위해 인과율(causality)에 따라 유사한 행위의 패턴을 보이는 또 다른 앞뒤 점들을 찾아 이어서 선(line)을 형성한다. 그 선의 앞 점을 통해 원인도 밝히고 뒷 점을 통해 미래도 예측하려 한다. 그 겉 모습의 선을 찾자는 것이 환원주의다. 그러나 그 선을 점의 합이 아닌 면(face)의 분리로 보는 시각이 전일주의다. 면은 속 구조이자 시스템으로써 시스템 사고(systems thinking)는 가로와 세로 선처럼 다양한 선들의 파생을 한 면으로 수렴할 수 있게 해줘 사고의 차원을 단순화시켜준다. 또한 면은 또 다른 면과 입체(cube)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고의 확장까지 유도한다. 점, 선에서 면과 입체까지 시야에 들어오면 공진화(coevolution)라는 더 큰 시너지를 쓸 수 있다. 코로나19와 4차 산업혁명으로 그 주목도가 커졌다.
오늘의 우리 삶을 관통함에 있어 두 사고관의 차이를 이해함은 매우 유익하다. 일례로 교육관에도 그 특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교육에서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 ‘학습’이라는 단어는 배움과 익힘의 합성어이다. 배움은 남의 것을 내 안에 들이는 과정으로 이성과 보편성을 요구한다. 이에 반해 익힘은 배운 것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으로 감성과 개별성에 입각한다. 먹어 채우는 것이 배움이라면, 소화해 비워 에너지를 얻는 것이 익힘이다. 배움에 환원적 사고가 기초한다면 익힘에 전일적 사고가 기반한다. 현 교육에 화두인 융합은 환원적 사고위에서는 도모할 수 없다. 상호의존이라는 전일성의 이해 없이는 사상누각일 뿐이다. 세상에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만큼 창의적인 일은 없다. 이는 온전히 익힘으로만 가능할 뿐이다. 학생, 학교에서 학습생, 학습교로 전환해야 한다. 인간사의 모든 기쁨은 오직 자신을 극복하여 새로운 자신을 만나려고 하는 익힘을 통해 파생된다. 배우는 목적은 오직 하나, 익힘뿐이다. 오늘날 교육 문제의 근본 원인은 배움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배움에 멈춘 인간이 익히기 시작한 기계를 만나게 된다. 디스토피아(Dystopia)의 여명이다. 예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니체(F. Nietzsche)의 외침에 주목하길 바란다.
거대한 신 질서가 다가오고 있다
유한 자원의 무한 성장을 꿈꾸던 경제가 4차 산업혁명을 추진 중에 있다. 4차 산업혁명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시스템의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외부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개방 시스템을 강조한 베르탈란피(L. Bertalanffy)는 시스템을 개별 요소(element, node)와 그들간 관계(relation, link)의 집합으로 보았다. 그 시스템이 창출하는 에너지를 우리는 시스템 에너지, 시너지(synergy)라 한다. 따라서 4차 산업혁명은 시스템이 창출하는 가치가 기존의 한계 생산성이 체감하는 ‘토지’,’노동’,’자본’이라는 요소 중심에서 한계 생산성이 체증하는 관계 중심인 ‘네트워크’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요소의 수를 N이라 하였을때 이들의 관계수는 N(N-1)인 특징으로 인해 연결이 강화될수록 기하급수적 변화를 이르는 멧칼프의 법칙(MetCalfe’s law)이 작동하는 메커니즘으로 변모하게 된다.
이로 인해 4차 산업 혁명은 우리의 미래를 극단적인 현상으로 내몰것이다. 예상할 수 있는 한 극단은 허브(hub)라는 소수의 요소에 관계가 집중하는 ‘빈익빈 부익부’라는 승자독식의 양극화의 사회일 것이며, 다른 한 극단은 추가 생산비가 들지 않는 한계 비용 제로의 사회로써 공유와 나눔의 사회적경제가 될 것이다. 여기에 자동화와 로봇, AI가 결합하면 유급 노동에서 벗어나 자본주의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일하지 않는 사회’의 출현까지 기대할 수 있다. 이는 케인즈(J. Keynes)가 21세기가 되면 노동 생산성이 향상되어 주당 15시간의 노동으로도 충분히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시스템을 어떻게 형성하고 그 에너지인 시너지를 어떤 방향으로 극대화할 것인가라는 국가 리더십과 거버넌스가 너무도 중요해지게 될 것이다.
복지 자본주의, 사회와 자본과 기술 혁신을 공진화시켜라
우리 사회의 명암 정산을 위해 앞에서 살펴본 전일적 사고체계와 거대 신질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것을 주문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허약한 사회정책의 전개 방향을 4차 산업혁명이라는 기술 혁명과 자본 시장을 활용한 자본주의 경제와의 공진화하는 이른바 ‘복지 자본주의’의 전개가 그것이다. 환원주의를 극복하여 인위적으로 분리한 경제와 사회 시스템을 원래대로 상생하는 전일적 시스템으로 되돌려 놓자. 초연결을 활용하여 더 큰 시너지를 내도록 하자. 엔진이 경제라면 사회는 브레이크이다. 이제 브레이크가 고장난 폭주차를 내다 버리자.
사회+금융+기술의 공진화를 근본으로하는 복지 자본주의의 일면은 다음과 같을 수 있다. 먼저, 정부는 퇴직 연금과 같은 공적 연기금을 자본시장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자. 연기금의 투자 확대는 기업가치를 올려 기술혁신을 독려할 수 있으며 창출된 제품과 서비스로 사회정책을 견인하게 하고 아울러 확대 투자로 청년 창업, 저출산, 노후 대책을 마련하는 선순환 구조를 형성하도록 하자. 현재 퇴직연금(‘19)의 경우, 그 규모가 220조원이 넘는데 이중 주식과 채권에 대한 투자가 각각 전체의 2%와 6% 수준에 (2%대 수익률) 머무르고 있다. 미국, 호주, 캐나다 등의 퇴직연금의 주식 투자 비중 40%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으며, 일본의 15% 수준과도 큰 차이가 있다. 채권까지 포함하면 한국 8%, 미국, 캐나다, 호주는 60~70%, 일본은 75% 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진다. 더 큰 문제는 퇴직 연금 가입자중 97%가 사전에 해약하는 등 연금의 취지가 무색하게 작동하고 있음에도 정부가 해법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2020년 현재 주식시장의 규모(시가총액)는 미국, 일본의 경우 한국 대비 각각 20배(30조$), 4배(5조$)이며, 미국 애플(1.5조$)의 시가총액이 한국 전체 주식시장의 시가총액과 비슷한 수준에 있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주식시장의 규모는 경제규모에 비해 저평가되어 있어 너무 낮은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20, 국가별 PER(주가수익비율)값은 미국 23.7배, 일본 23.6배, 중국 16.4배, 한국 15.4배). 한편, 국민연금의 경우 2023년 현재 거의 1,000조원에 이르는데 이중 국내 주식 보유분은 145조원으로 보유 비중을 15% 내외에서 기계적으로 맞출 수밖에 없는 규제는 국내 증시 성장은 물론 산업경제 성장에도 적지 않는 제약이 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자본시장을 활용해 노후대책을 국가가 간접적이지만 매우 효과적으로 견인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을 단순하게 시장 지향적인 국가로만 이해했다면 이는 반만 이해한 것임을 앞에서 지적하였다. 미국은 401K라는 정책을 통해 모든 취업자가 퇴직연금에 적극적으로 가입토록 권장하고 있다. 미국 증권시장의 장기적인 우상향 성장세는 경제적 성장외에도 대국민 노후 대책의 안정적 견인이라는 정부의 역할과도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정부는 공공R&D를 통해 장기간 개발이 필요하거나 불확실성이 높은 기술 및 기반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시장에 위양해 민간 시장을 부양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기술이 국방부가 개발한 인터넷, 해군이 개발한 반도체, 국립보건원에 의한 신약개발뿐 아니라 음성인식, 터치스크린, 배터리, 모바일, 우주항공 기술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토대 기술들은 민간이 독자적으로 개발하기 어렵기에 정부가 나서서 개발하고 이를 민간에 전수해 기업 가치 제고로 수많은 벤처들의 기술들을 주식을 주고 살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는 스스로 기술을 개발하는 것보다 양질의 기술을 빠르게 흡수할뿐 아니라 개인 창업 및 고용 활성화에도 엄청나게 기여하여 세계적인 기업들의 끊임없는 등장 배경이 되고 있다. 이렇게 상당부분의 퇴직 연금에 할당된 주식 투자는 기업가치 제고라는 주가 상승으로 나타나 궁극적으로 개인의 안정적인 노후대책으로 선순환되고 있다. 자본주의를 제대로 활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완전자율주행차가 가져올 노인과 장애인의 이동의 자유는 그 어떤 복지 정책보다 반향이 클 것이다. 자율자동차는 당연히 운전자와 운전면허증이 필요 없다. 안전 운행이 가능하기에 자동차 보험의 필요 여부와 필요시 제조사가 부담함이 타당할 정도로 차보험 관행에도 큰 변화가 야기될 것이다. 차의 구조물도 기존 철과 알루미늄에서 덜 강하고 덜 무거운 소재로 변화될 것이며, 또 한 대의 자동차로 가족이 모두 사용할 수 있으니 자동차, 대중교통 수요 및 주차와 도로 공간 등도 줄어들 것이다. 사고 환자를 진료하는 병원도, 카센터도 줄어들 것이다. 그 대신 차안에서 소비할 콘텐츠는 대폭 증가하는 등 이 혁신기술 하나만으로도 엄청난 사회적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없는 시스템은 없지만 자본주의를 대체할 시스템도 없다. 독단적 재분배가 아닌 자본시장을 활용한 복지자본주의의 전개는 복지와 자본주의가 모두 살 수 있는 길이다. 경제적 가치창출은 원래 집합적 과정이다. 다시 말해 기업의 전담이 아니라 상당 부분을 공공, 시민단체, 개인에 의한 인프라, 치안 등의 법질서, 양질의 노동력 제공 등의 토대 위에서 모두의 기여로 창출한 것이다.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홀로 오벽지로 가서 현재와 같은 부와 건강을 누릴 수 있는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 80% 이상은 공공이 제공한 우수 인력, 공적 인프라 위에 얹혀진 결과임을 기업도 자각해야 한다.
한편, 기업의 주인인 주주에게 배당을 지급하듯이 국가의 주인인 국민에게도 국가 배당금의 지급도 검토해야 한다. 어떠한 형태가 되었건 기본 소득이나 인권이 강조된 사회 배당금의 대국민 지급은 시혜가 아닌 권리라는 가치를 존중하고 이것이 자본주의 최대 성과라고 받아들일 때 우리의 자본주의는 더욱 성숙할 것이다.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
복지자본주의라는 공진화 시도는 경제정책과 별개로 추진되어온 기존 사회정책을 비용 효과적으로 유도할뿐 아니라 극심하게 전개될 양극화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오히려 기존의 독단적 복지정책이 더 많은 재원 소요를 야기하는 고비용 정책이며, 고객 욕구 충족의 최선봉 조직인 기업을 배제한 시도는 국민을 더욱 불행하게 만들 것이다. 원래 하나의 시스템으로 구동되는 공동체를 사회, 경제, 환경 분야로 분리해 정책화한 환원적 정책은 이제 더 이상 유효하지도 않고 타당하지도 않음을 코로나를 통해 확인하였다. 현재 한국의 사회정책은 저출산, 노후 빈곤과 자살 문제, 청년 실업을 해결하기에는 매우 힘겨워 하고 있다. 성장 과실의 가치 논쟁이 국민들이 개별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적 고통보다 더 중요할 수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리더의 자질과 거버넌스는 과거 문제를 보완하고 해결함에 치중하려는, 주춤하고 어정쩡한 리더십이 아니라 전대미문인 기술혁명의 방향을 이해하고 한번도 안 가본 길을 과감하게 내딛는 진취적이고 책임감있는 리더십이다. ‘인간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지? 인간답게 살기 위해 기술과 어떻게 공존해야 하는지?와 같은 질문들이 공론장을 도배해야 한다. 오늘 우리의 시간은 우리 공동의 미래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순간 속에서 흐르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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