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위기인가? : 다른 시선, 다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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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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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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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방송가의 대세(?) 콘텐츠는 ‘저출생/저출산’인 듯하다. TV에서는 저출산 위험에 대한 경고나 출산 장려 메시지가 이런저런 스토리로 각색되어 날마다 전파를 탄다. 대개 정부 정책에 발맞춘 계몽성 프로그램이거나, 드러내놓고 정책 홍보로 일관하는 내용들이다. ‘힘들지만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한다’거나 ‘안심하고 아이를 키울 수 있도록 국가가 환경을 조성해 가겠다’고 설득한다. 그리고 참고할 만한 모범사례로 스웨덴이나 프랑스, 헝가리 같은 나라들에서 가족들의 행복해 보이는 모습을 전시한다.
이런 홍보나 계몽이 전혀 효과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라의 미래를 위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아이를 낳아 키워야 한다는 결의를 다질 수 있고, 누군가는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스웨덴처럼 출산과 양육이 부모에게 혜택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기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비슷비슷한 콘텐츠들의 홍수 속에서 출산과 양육의 가치와 의미를 새로 깨닫거나 국가 정책에 대한 믿음을 갖게 된 사람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은 없으며, 프랑스나 헝가리가 우리가 따라야 할 모델인가에 대한 지적이 적지 않다. 30여 년 동안 들어온 ‘스웨덴 사례’를 왜 우리는 아직도 ‘그림의 떡’처럼 보고만 있어야 하는지, 그동안 정부는 무엇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도 들린다.
지금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이런 질문이다. ‘인구 위기’는 정말 위기인가? 위기라면 어떤 의미에서 그런가? 정부의 ‘출산 장려’ 호소에 국민들이 호응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국민들은 ‘인구 위기’를 진심으로 ‘위기’라고 느끼고 있을까?
그런데 내 주위에는 인구감소를 위기라기보다 당연하고 불가피하며 심지어 바람직한 추세로 보는 이들이 있다. 주로 여성들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설명도 어렵지 않다. 역사적으로는 1960년대 이래 40여 년간 계속된 출산억제 정책이 갖는 경로의존성이다. 50대 이상의 여성들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식의 구호가 실린 포스터가 일 년 내내 붙어 있는 교실에서 성장했다. 이 세대 여성들의 의식 속에는 자녀 수는 적을수록 좋다는 인식이 DNA처럼 박혀 있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사회의 돌봄노동에 대한 부정의(injustice)의 결과다. 베이비부머 세대 여성들은 네댓 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아 키우느라 허리가 굽은 어머니들을 보며 컸고 자신들도 두, 세 명의 자녀를 낳으며 직장을 떠난 경험이 있다. 가부장적 가족 속에서 남성 생계부양자와 아이를 돌보며 경제적 무능력감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들은 이제 딸들이 자신과 같은 양육자-전업주부의 경로를 선택하지 않기를 바란다. 딸들에게 공부 열심히 해서 전문직을 가지라는 충고와 함께 결혼이나 출산은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고 가르친다. 지난 6월 한국일보가 조사한 MZ세대 여성의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인식에서 결혼이나 출산을 하지 않겠다는 여성들이 이유로 제시한 것이 어머니의 지지였다. “엄마가 결혼하지 않고 네 일을 해도 좋다”고 했고 그렇게 살겠다는 것이다. 어머니 세대 여성들의 헌신에 대한 사회적 인정의 부족, 경제적 보상의 부재가 세대를 넘어선 여성들의 비혼·비출산 동맹으로 귀결되어 온 것이다.
따라서 페미니스트들은 ‘가부장적 규범의 영향력이 사라지지 않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에게 출산을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의로운가?’라는 질문을 제기해 왔다. 젠더 정의(gender justice)의 관점에서 보면, 출산은 성별 불평등의 핵심적 원인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고 키우는 데 헌신할수록 경제적으로 불안정해질 위험도 커지기 때문이다.
나아가 페미니스트들은 ‘인구감소는 지구의 지속가능성에 유익한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다. 인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은 인구수가 국가의 방위력이자 경쟁력이라는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 개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개념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21세기 사회에서 국가 간 무력 전쟁이나 시장 경쟁 시 점점 더 중요한 수단은 기술혁신에서 나온다. 인공지능을 기반으로 한 첨단 무기나 로봇은 무력 전쟁이든 경제 전쟁이든 인간을 대신해 나갈 것이다. 그러므로 인구수보다는 인간의 역량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페미니스트들은 인류세(Anthropocene)의 문제의식에서 인간이 초래해 온 환경 파괴에 주목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제 인간예외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과 비인간, 자연은 더 이상 분리된 존재들이 아니며, 지구라는 물리적 공간에서 함께 살아남기 위해서는 인간의 파괴적 행위를 중지해 가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인구감소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가 될 수 있다. 식물과 동물, 인간을 포함한 자연이 공생해 갈 수 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 사회학자로서 나는 한국의 인구감소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미래세대가 져야 할 부담을 예측조차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 한 가지 제안을 한다면, 문제의 정의부터 다시 해 보자는 것이다. 인구감소는 한국사회에 언제나 나쁜 것인가? 적정 출산율, 적정 인구규모는 어떤 요인들과 변화 속에서 정의되어야 하는가? 자연파괴와 기술혁신, 인구변동의 무대인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 속에서 기업의 책임은 어떻게 정의되어야 하는가? 출산의 주체인 여성과 남성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국가는 어떤 철학을 가져야 하나?
아이러니하게도 정부의 정책은 더 나쁜 방향으로 가는 듯하다. 별 효과 없는 홍보 프로그램 속에서 헝가리 같은 나쁜 사례―극우 포퓰리스트 정부가 성평등 정책을 일소하고 현금을 풀어 여성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압박하는 상황―가 모범사례로 포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이들의 황망함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뿐인가. 영아살해 사건에서 생모들만 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뉴스는 여성들에게 출산의 책임은 당신에게 있다는 무언의 메시지로 읽힌다. 이렇게 해서는 국민들을 설득할 수 없다. 다른 시선에서 다른 질문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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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아(한림대 사회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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