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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그 야누스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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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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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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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신화에서 야누스(Janus)는 문(門)의 신이다. 문에는 앞뒤가 없다. 양면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야누스는 한 몸에 과거와 미래 두 얼굴을 가진다. 한쪽은 과거를 응시하고 다른 한쪽은 미래를 보고 있다. 과거를 통찰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프랑스 정치학자 듀베르제는 ‘정치란 야누스의 얼굴’(politics as Janus faced)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정치가 가진 두 얼굴 야누스의 모습이 정치다. 갈등으로부터 통합을 추구하고, 과거로부터 미래를 지향하는 것. 그런데 갈등만 보고 통합을 보지 못하거나 미래만 보고 과거를 잊는다면 정치는 일그러지고 만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4일 미국 국빈 방문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WP)와 인터뷰에서 한·일관계 회복 결단과 관련, ‘안보의 시급성으로 더이상 협력을 미룰 수 없었음’을 설명하며 “유럽은 지난 100년간 수차례 전쟁을 경험하고도 전쟁 당사국끼리 미래를 위해 협력할 방법을 찾았다.... 100년 전에 일어난 일 때문에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거나, 일본이 100년 전 역사 때문에 (용서를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검찰총장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준 ‘정의의 집행자’ 이미지, 즉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Fiat justitia, ruat caelum”(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에서 출발한다. 정의를 집행하는 검사에서 정치인으로 변신이 보인다.

한국 민주주의는 세계로부터 주목받는 민주화 성공 사례다. 영국 Economist Intelligence Unit(EIU)이 발표하는 세계의 ‘민주주의 지수’(Democracy index)에 20위 권을 오르내리며 빠른 산업화 이후 민주화를 성공시킨 대표 사례다.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 역시 야누스의 얼굴처럼 이중적이다. “민주화가 산업화라는 토양이 없이도 성공, 유지가 가능했을까”라는 의문 때문이다. 민주화의 성공에 운동권의 헌신, 정치인들의 노력이 중요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산업화의 성공으로 만들어진 중산층의 지지 없이도 민주주의로의 이행은 물론 민주주의 유지가 가능했을까? 민주화 세력이 그렇게 부정해 온 산업화 세력이 이룬 경제성장이 한국 민주화에 결정적이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야누스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산업화와 민주화는 적대적이지 않았다. 영국의 산업혁명이 만들어 낸 산업 부르주아(industrial bourgeoisie)가 의회민주주의(parliamentary democracy)를 탄생시켰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배링턴 무어(Barrington Moore) 명제다. 또 북유럽의 정치경제 선진국들은 예외 없이 민주주의와 경제적 부를 함께 성취하고 있다.
최근 민주주의 모습 또한 이중적이다. 세계적인 민주주의 모델 국가들에서 민주주의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선진국 ‘민주주의 후퇴’(democracy in retreat - Freedom House의 2019년 보고서 제목) 현상이다.

영국은 근대 세계사에서 대의민주주의가 가장 먼저 발전하고 정착한 민주주의 모범 국가였다. 그랬음에도 보리스 존슨(Borris Johnson)은 총리에 오르면서 의회 정치를 극단으로 몰고 갔다. 존슨은 ‘노딜 브랙시트(No Deal Brexit)’를 강행하기 위해 의회를 장기 간 정회시켰고 이에 대해 대법원은 “의회 정회 조치는 위법”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결국 존슨 총리는 2021년과 2022년 코로나 봉쇄 기간 총리 관저 및 여러 장소에서 최소 19차례의 비밀 술 파티를 가진 것으로 밝혀져 사임했다.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의 보루 국가로 지칭되는 미국에서도 최근 포퓰리즘 현상이 등장하는 역설이 발생했다. 자신을 비판하는 언론을 ‘가짜 뉴스’로 공격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행동에 대해 독일 슈피겔은 “각국 독재자의 롤 모델이 되어 세계에 재앙을 퍼뜨리고 있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이러한 미국 민주주의 후퇴의 원인을 하버드의 스티븐 레비츠키와 다니엘 지블렛(Steven Levitsky and Daniel Ziblatt)은 “민주주의는 언제나 위태로운 제도였다”고 갈파한다. 민주주의가 늘 위태로운 제도였다고?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How Democracies Die, 2018)에서 미국이 민주주의를 버틸 수 있었던 요인들로 ‘헌법, 자유와 평등에 대한 확고한 믿음, 역사적으로 탄탄한 중산층, 높은 수준의 부와 교육, 다각화된 민간영역’을 들었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를 버텨내는데 ‘정당과 관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알렉시스 토크빌(Alexis Tocqueville)이 1835년에 낸 『미국의 민주주의』에서 주장한 민주주의에 중요한 요인으로 ‘자연환경, 헌법, 습속(mores)’ 가운데 ‘습속’이 가장 중요하다는 논지와 일맥상통한다.

레비츠키와 지블렛에 따르면 트럼프 등장 이후 미국 정치는 ① 경쟁자를 적으로 여기고, ② 언론의 자유를 억압하고, ③ 선거 불복을 선언하고 있다.

그러면 지금 한국의 민주주의는 어떠한가. 트럼프가 자신의 정치 경쟁자에 대해 부정하며 경쟁자를 전복 세력이나 헌법 질서의 파괴자라고 비난했던 것처럼 문재인 정부에서는 상대 세력을 ‘국정농단 세력’으로 지목하고 처벌했다. 같은 맥락에서 윤 대통령은 취임 후 지금까지 야당 대표와 한 차례도 공식 대화의 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 트럼프가 정치적 경쟁자를 국가 안보나 국민의 삶에 위협을 주고 있다고 주장한 것처럼 우리 민주정치에서는 정치적 상대를 ‘빨갱이’나 ‘국정농단 세력’으로 지목해왔다. 같은 차원에서 과거 박근혜 정부에서 장관 등 고위직을 했던 다수가 검찰 수사 시 무조건 구속의 대상이었고 수갑 채운 모습 공개는 일상이었다. 지금도 집회에서는 반대 세력에 대해 비난과 조롱, 상대 정당 해산 요구가 난무한다. 광화문 시위대와 시청앞 시위대로 갈려 서로 죽일 듯 미워하고 ‘현직 대통령 탄핵’과 ‘전임 대통령 감옥 보내기’ 구호로 대치하고 있다.

미국 트럼프의 포퓰리즘과 대한민국 대통령의 포퓰리즘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트럼프가 대법원 판사를 중립적인 인사가 아닌 자신의 사람으로 지명했던 것처럼 한국에서도 대법원, 검찰, 선거관리위원회, 감사원을 자신의 진영 인사로 채워 정치적 상대(적)를 제압하는 ‘무기로 활용’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권을 잡고 나서는 대통령은 자신과 뜻이 맞는 인사를 쓸 권리가 있다는 논리로 자기 진영 사람으로 채우기를 강행하고 있다. 하지만 그 자리는 장관 등 정무직에만 해당하는 것이고 권력 견제 기관은 중립적인 강직, 청렴한 인물을 발탁해서 임명하는 것이 헌법 정신임을 잊고 있다. 미국과 한국 민주정치 모두 ‘심판 매수’에 열을 올리는 형국이다.
결론은 미국의 민주주의와 한국의 민주주의 모두 혼돈 속에서 비틀거리고 있다. 해결책은 무엇인가? 레비츠키와 지블렛은 “확신할 수 없지만 견제와 균형의 매디슨 시스템(Madisonian system)은 트럼프도 이겨낼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만든 설계한 헌법의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 작동할 수 있도록 성문화되지 않은 ‘상호 관용’(mutual toleration)과 ‘제도적 자제’(institutional forbearance)라는 두 가지 규범을 준수할 것을 강조한다. 관용과 절제라는 ‘민주주의 가드레일’이 민주정치를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어떤가. 건국의 아버지는 분열했고, 헌법은 상시 개정의 대상이다. 문재인 정부의 청와대 독주를 표징하는 ‘청와대 정부’라는 용어는 지금 윤석열 ‘용산 정부’에서도 그 본질이 이어지고 있다. 문재인 정부 시절 청와대에서 모든 행정부처를 장악해 ‘청와대 정부’라는 비난을 받았고 그래서 윤석열 정부는 청와대를 떠나 용산으로 집무실을 옮겼지만 ‘청와대 비서실’ 대신 ‘용산 비서실’로의 권력 집중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용산으로 옮겼어도 왜 대통령과 비서실은 변하지 않을까? 원인은 대통령제와 대통령 선거의 특질 때문이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선출 대통령에 투영된 ‘구세주(savior) 열망’ 때문에 등장인물만 바뀔 뿐 대통령의 시스템적 독주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는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대통령의 심기를 살폈듯이 민주화 이후에는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대통령의 눈치만 보게 되는 상황으로 인물만 바뀌었다.

내각제에서는 총리의 심기나 눈치를 살필 이유는 적어진다. 하지만 내각제에서는 국민이 생각하는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줄 ‘국민의 영웅’은 탄생하지 않는다. 내각제에서는 홀연히 나타난 카리스마의 기대주가 ‘별의 순간’을 잡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7년 에마누엘 마크롱이 『혁명』이라는 책을 내며 39세의 나이로 프랑스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일이 독일 내각제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독일 앙겔라 메르켈은 연방의회 선거에 당선된 지 15년 만에 총리가 됐고, 영국의 토니 블레어는 의회에 진출한 지 14년 만에, 일본 아베 신조는 의원이 된 지 13년 만에 총리가 됐다. 정치에서 십수 년 이상을 견뎌낸 닳고 닳은 정치인이 총리가 되는 것이다.

한국 대통령제는 현실을 타개할 ‘구세주 열망’과 팬덤이 공생하는 모순을 보이고 있다.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러스트 밸트(rust belt) 유권자의 ‘구세주 열망’이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을 가져왔고 극성 트럼프 지지자들의 시위는 따라온 덤이었다.

결국 대통령제에서 민주주의 정치는 안녕하기 힘들다. 국민이 가지고 있는 세상을 바꾸는 ‘구세주 열망’이라는 습속과 극성 팬덤이 사라질 즈음 민주주의는 한층 발전할 것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구세주 열망’과 ‘민주’(민이 주인이며, 민이 다스린다)라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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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영(한림대 정치행정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