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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 사이, 교차점에 선 한국과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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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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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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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차점에서 열린 새로운 국면


·중 전략 경쟁이 동아시아 질서를 흔들고 있다.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서 한국과 일본은 단순한 이웃을 넘어, ··일과 한··일의 두 개의 삼각 구도가 교차하는 전략적 교차점에 서 있다. 이 두 축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한국과 일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아시아의 미래 질서가 달라질 수 있다.

지난 823일 열린 이재명 대통령과 이시바 시게루 총리의 첫 정상회담은 이런 물음을 실제로 시험할 기회를 제공했다. 두 정상은 17년 만에 공동 발표문을 채택했고, 멈춰 있던 셔틀 외교를 복원했다. 청정에너지, 인공지능, 저출산·고령화 대응, 재난 협력, 안보 공조 까지 합의 의제는 폭넓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회담이 한··일 삼각공조를 한층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중국을 견제할 수 있는 이중적 전략 공간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은 경제 현안에서도 확인된다. 같은 달 일본이 시작한 용융 아연도금 강판에 대한 반덤핑 조사는 한··일 제조업 네트워크의 민감성을 드러내며, 양국이 공동 모니터링 체계와 신속 대응 채널을 갖출 필요성을 부각시켰다. 반도체와 첨단기술 분야에서도 다자 협의체, 예컨대 Chip-4 논의가 활발히 진행되며, 수출통제와 기술 협력이 국가 간 정책 아젠다의 핵심 우선순위 가운데 하나로 부상하였다.

요컨대, 지금은 '이중 삼각 전략'을 단순한 담론이 아닌 실제 정책으로 옮길 수 있는 절호의 시점이다. 정상회담의 정치적 추진력, 무역 규제의 긴박성, 기술 협력의 절실함이 맞물리며, 한국과 일본이 동아시아 질서에서 미·중 경쟁을 조율하고 지역 안정의 균형추를 형성할 전략적 중견국(Pivotal Power)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략을 지탱하는 이론적 토대

이중 삼각 전략은 공허한 수사가 아니라 국제정치 이론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헤징(hedging) 이론은 강대국 간 불확실성이 큰 시기, 중견국이 전면적 편승이나 균형이 아니라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을 선택한다고 본다.

한국과 일본이 동시에 미국과 중국을 상대로 협력과 견제를 병행하는 모습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중견국 이론은 한국과 일본 같은 국가가 단순한 추종자가 아니라 규범 중개자 역할을 할수 있다고 강조한다. 두 나라가 다자 포럼과 제도 설계에서 분쟁을 완화하는 역할을 한다면, ··일과 한··일 협력이 충돌이 아니라 상호보완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다자주의 이론은 규칙과 제도가 강대국 간 충돌을 억제한다고 본다. 결국 한·일 협력은 위험 분산, 규범 중개, 제도 활성화라는 세 축을 동시에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이다.

 

 

넥서스 지정학: 다층적 연결의 힘

최근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넥서스'. 넥서스 지정학(nexus geopolitics)은 에너지, 자원, 기술, 공급망, 해양, 디지털 등 여러 연결점이 맞물리며 경쟁과 협력을 재구성한다고 본다. 예컨대 반도체, 핵심광물, 전력, 해상 물류, 데이터가 하나의 사슬처럼 엮이면, 그 효과는 단순한 합산이 아니라 기하급수적 파급력을 지닌다.

정책적으로 이는 단일 이슈 접근을 넘어, '넥서스 포트폴리오' 방식의 통합 협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은 반도체와 에너지, 해양과 디지털, 기후와 보건 같은 분야를 동시다발적으로 묶어낼 때 더 큰 전략적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우선 협력해야 할 여섯 개의 넥서스 분야

 

첫째, 반도체·첨단소재. '웨이퍼--칩 협의체'를 만들어 공급망 전 과정을 아우르고, 미국의 수출통제와 사전 조율을 추진해야 한다. 또한 동남아·인도 공동 투자로 글로벌 공급망을 다변화할 필요가 있다.

둘째, 핵심광물·재활용. 전기차·배터리·반도체에 필요한 자원의 수입 의존을 줄이기 위해 공동 재고와 재활용 R&D를 추진하고, 3국 채굴·가공 투자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

셋째, AI와 반도체 산업의 전력 수요 급증에 대응해, 그린수소와 초고압 직류 송전(HVDC: High Voltage Direct Current) 공동 연구를 강화해야 한다.

넷째, 해양안보·자원 해상교통로와 어업자원 보호, 재난 대응을 위해 공동 해양감시와 해양규범 선언, 합동 훈련이 필요하다.

다섯째, 디지털·사이버. 데이터 이동과 프라이버시 기준을 맞추고, 사이버 위협을 공동 모니터링하며 '디지털 신뢰 파트너십'을 설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여섯째, 보건·기후. 팬데믹 대비 백신 공동 비축, 재난 대응 네트워크, 기후 영향 공동 모니터링은 필수적이다.

 

 

·중을 향한 설득 전략

 

··일 협력이 확대될 때 중국은 이를 단순한 안보 공조가 아니라 군사훈련 강화와 첨단기술 표준화가 결합된 전략적 압박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예컨대 미사일 방어체계나 합동훈련의 빈도 증가는 중국이 민감하게 여기는 군사적 신호이며, 반도체·AI 분야의 기술 표준화 역시 중국 기업의 시장 접근을 제약할 수 있는 구조로 비칠 수 있다.

따라서 중국 입장에서 한··일 협력은 단순한 지역 협의체가 아니라, 자국의 전략 공간을 축소시키는 잠재적 봉쇄 메커니즘으로 인식될 여지가 크다. 그러나 동시에 이 협력 구도는 중국에 실질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 한반도의 안정을 제도화하고 위기 관리 체계를 강화한다면, 북한 급변 사태에 대비한 국경 관리 비용과 난민 발생 위험을 줄여준다. 또한 한국과 일본이 제안하는 공급망 안정화, 재난 대응 협력은 중국 기업에게도 예측 가능한 무역 환경을 보장해 준다. 불확실성이 줄어든다는 점에서 이는 중국 경제에도 긍정적이다.

따라서 한국과 일본은 중국을 향해 단순히 "참여하라"라는 요청이 아니라, 안정이 주는 경제적·안보적 실익을 수치와 시나리오로 입증해야 한다. 예를 들어, 북한 국경 불안정으로 발생할 수 있는 난민 유입 규모, 관리 비용, 교역 차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협력이 이를 얼마나 줄일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동시에 중국이 참여할 수 있는 넥서스 프로젝트별 옵션-예컨대 에너지 전환, 기후 대응, 보건 협력을 설계해 "부분적·조건부 참여"의 경로를 제도화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일 군사협력이 중국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지역 안정 차원의 예방적 조치임을 입증하기 위해, 훈련 사전 통보, 긴급 연락망 구축, 해양 충돌 예방 규약 같은 신뢰구축 장치를 병행해야 한다.

반면, 미국은 다른 우려를 가진다. ··일 협력이 강화되면, 미국은 이를 동맹 내 균열이나 규범 분화로 인식할 수 있다. 특히 무역 규범이나 데이터 거버넌스 같은 영역에서 한국과 일본이 중국과 별도의 협의체를 운영하면, 미국은 자국의 전략적 영향력이 약화되고 "-미국 중심"의 규범 질서가 형성될 것을 우려할 수 있다. 이런 불안은 워싱턴의 정치·안보 엘리트뿐 아니라, 미국 내 기업과 산업계에도 확산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한··일 협력은 미국에도 구체적 이익을 제공한다. 세 나라가 북한 문제나 재난·보건 위기를 공동 관리하면, 미국의 직접 개입 필요성과 재정·군사적 부담이 크게 줄어든다. 예컨대 팬데믹 대응 체계나 공급망 위기 관리가 한··일 차원에서 안정적으로 작동하면, 미국은 값비싼 군사 자원이나 긴급 재정을 투입하지 않아도 된다. 또한 세 나라가 규범을 조율해 시장 예측 가능성을 높이면, 이는 미국 기업에게도 새로운 시장 접근과 투자 기회를 열어준다.

따라서 미국 설득은 세 축으로 구체화될 필요가 있다. 첫째, 부담 경감 효과를 수치화해 제시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 협력이 북한 위기 관리에서 미국의 군사 배치 비용을 얼마만큼 절감할 수 있는지를 정량적으로 설명해야 한다. 둘째, 규범 논의 과정에서 미국의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데이터 거버넌스나 무역 규범을 논의할 때 미국 전문가와 기업이 반드시 포함되도록 구조를 설계해야 한다. 셋째, 경제적 참여 유인을 제공해야 한다. ··일 협력이 단지 지역적 블록이 아니라, 미국 기업에도 입찰·투자 기회를 보장하는 개방적 플랫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한국과 일본은 중국과 미국 모두에 대해 위협이 아니라 실익"이라는 메시지를 구체적 수치와 제도적 장치로 증명해야 한다. 중국에는 안정과 참여의 실익을, 미국에는 부담 경감과 시장 기회를 입증하는 설득 전략이 요구된다. 그렇게 할 때, ··일과 한··일이라는 두 삼각 구도는 충돌하지 않고 공존할 수 있다.

 

 

국내적 리스크와 협력의 동력

 

·일 협력은 민족주의, 역사 갈등, 산업 경쟁, 언론의 극화 같은 내부 변수에 흔들릴 수 있다. 이를 관리하기 위해 독립적 역사위원회, 정보 공유 프로토콜, 민관 산업포럼, 공동 미디어 가이드라인, 초당적 법제화가 필요하다. 반대로 민주주의 제도 공유, 산업 보완성, 청년 교류, 공동 안보 이익은 협력의 동력이 된다.

 

 

공존을 향한 전략

 

·일 협력은 이제 단순한 과거사 관리나 무역 분쟁 해결을 넘어섰다. ··일 협력의 중심축으로서 미국에 공동 대응하고, 동시에 한··일 협력 속에서 중국을 견제하면서 협력의 균형자로 기능할 수 있는 전략 공간이 열렸다. 이는 두 삼각 구도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준다. 넥서스 지정학의 관점에서, 이익은 수치와 사례로 입증하고, 위협은 제도와 절차로 억제하며, 신뢰는 포용적 설득으로 구축해야 한다. 한국과 일본이 이 원칙을 기반으로 제도화를 추진한다면, 동아시아의 안정과 글로벌 질서 복원에 기여하는 전략적 중견국(Pivotal Power)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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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웅(한림대학교 글로벌협력대학원 교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