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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과 갈등, 교유(交遊)의 갈래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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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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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호

본문

J와의 대화

 

"해방된 지 50년이나 지났는데 뭐가 그리 아직도 아프다는 거냐?”

 

J가 사뭇 공격적으로 물어왔다. 한국 측의 사죄, 반성 요구가 못마땅하다는 뜻이다. 한 세대 전의 일이다. 그의 성향은 익히 아는바, "일본을 일본답게 하는 것은 천황제이다. 왕조가 뒤바뀌어온 다른 나라들과 달리, 끊김없이 수천 년 지속된, 세계에 유례없는 제도이자 전통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또 거품경제 붕괴와 미국 주도의 정보혁명으로 일격을 얻어맞은 일본을 어떻게 재생시킬 것인가 부심하며 공부모임도 꾸리고 있었다. 세계적 현안으로 떠오른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실 여부나 윤리의 차원이 아니라 "한 나라의 피해 사례를 인정하면, 결국 모든 나라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 그러니 안 된다"라는 입장이었다.

이런 친구에게 어떻게 답을 해야 설득력이 있을까 고민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한국의 '반일감정'은 일부러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전해져 온 것이다. 내 큰아버지는 일제 말기 중3의 나이에 시국사건에 연루되어 병을 얻고 몇 달 만에 돌아가셨다. 이 일은 교과서에 실려 있지도 않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저 1년에 한 번 성묘를 가면, 마지막 차례에 작은 봉분 앞에서 '가엾은 우리 형님...' 하고 아버지가 안타까워하시는 것을 보았을 뿐이다. 이 일로 성토하거나 배상이나 보상, 사죄를 요구한 적도 없다. 알려지지 않은 이런 아픈 사연들이 많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슬픈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바라고, 아픔에서 빠져 나오고 싶다. 그런데 일본 쪽에서 한편으론 유감 표명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일본이 조선을 발전시켰다. 수탈이나 탄압은 없었다'는 식의 발언이 나오니 심기가 편할 수 없다. 상처도 아물 수 없다. 그런 말이 안 나오게 할 수 없을까?"

 

그러자 J는 묵묵히 듣기만 할 뿐 더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리곤 다음 번에 만나니 한층 누그러진 태도로 말했다. “리상, 한국 측의 생각은 잘 알겠다. 하지만 일본이 국가적 차원에서 사죄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과거의 모든 제국주의 국가들이 피지배국가와 식민지에 대해 사죄하는 때가 온다면, 그때는 일본의 사죄도 가능할 것이다." 철저히 현실주의적으로 힘과 실리를 우선시하는 견해였고,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공격적인 어조는 사라졌고, 한국 측의 심정은 이해한다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회사원이던 그는 이후 직장을 그만 두고, 고향에서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근황은 알지 못하나, 일본의 '국익'을 최우선하는 소신에 입각하여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90년대의 진전과 한계

 

돌이켜보면, 한일관계의 많은 진전들이 1990년대에 이루어졌다. 19918, '일본군 위안부' 피해에 관한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후, 19938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장관은 위안부 관련 일본군의 직간접적 관여를 인정하고 사과하였다. 19958월에는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총리대신이 아시아 나라들에 대한 일본의 전쟁범죄와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 사과하였다('전후 50년 특별담화').

199811월에는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 총리대신이 '21세기의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는 "일본이 과거 한때 식민지 지배로 인하여 한국 국민에게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주었다"라는 '역사적 사실'"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의 사죄"라는 내용이 담겼다. 한국 국민을 지칭하여 문서로 제시한 최초의 공식 사죄 표명이었다.

J의 견해와는 다른 이런 흐름이 더욱 확대된다면 한일 간의 뿌리깊은 앙금이 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얼핏 보이던 시기였다. 그러나 90년대는 '과거사 반성'에 대한 반발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과거의 군국주의에 대해 비판적인 기존의 주류 역사인식을 '도쿄재판사관',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하고 '대동아전쟁'을 긍정하는 역사수정주의를 펼친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전통신앙 신도 기반의 국수주의적, 극우적 정치조직인 '일본회의'의 결성이 모두 1997년에 이루어졌다. 이런 흐름은 서브컬처 혹은 대중문화와도 결합한다. 고바야시 요시노리의 만화 <고마니즘솅겐> (오만주의 선언), 21세기 이후 '넷우익'의 언설, 아마미야 샤린의 <망가 혐한류>로 이어졌다.

이 시기는 수십 년간 나름 평화롭고 여유있게 지내왔던 일본사회가 대형사건과 재해로 인해 일대 충격을 겪었던 때이기도 하다. 19951월의 '아와지한신 대지진', 3월의 '옴 진리교 지하철사린가스 살포 사건', 1997년 상반기의 엽기적인 '고베 연속 아동 살상 사건' . 안 그래도 경제침체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던 중에 충격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고, 위기감은 이후 국가주의적 성향이 자라는 토양이 된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의 주역 오부치 수상도 급서한다.

 

 

21세기 이후 일본의 '우경화', 한일 갈등의 격화

 

오부치의 뒤를 이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5년간의 총리 재임 중 정치경제개혁에 주력하면서도 연거푸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이전 지도자와 다른 면모를 보였고, 그 뒤를 북한의 '일본 민간인 납치' 문제를 대대적으로 성토하며 떠오른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이어 받았다. 헌법 개정과 자위대의 국방군화가 그의 소망이었으나, 2008년 민주당에 정권을 내어 준다. 이때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수상이 잠시나마 '아시아 중시' '우애'를 내세우기도 했고, 간 나오토(菅直人) 수상은 2010년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재확인하고, 조선왕실의 궤를 반환하는 등의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는 침체되고, GDP 면에서 중국에 역전당하는 가운데 2011311'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라는 전대미문의 참사가 발생하며 일본은 또다시 큰 충격을 받게 된다. 결국 2012년 말 아베가 재집권하고, 이후 20227월까지 전후 최장기집권 기록을 세우며 원래의 소망대로 국가를 바꾸어 간다. 야스쿠니신사 참배, 안보법제 개정 등 '해석개헌', '전수방위' 원칙의 폐기, 자위대의 해외파병 등. 동시에 '고노 담화'에 대한 '검증'을 시도하여 "일본군이 관여한 증거는 찾을 수 없다"라며 역사적 사실을 뒤엎으려 하였다. 20158월에는 형식상 '식민지배', '반성', '사죄' 등의 문구를 쓰면서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지워선 안 된다"라고 명언한다('전후 70년 담화'). 아베 집권기는 서브컬처 격이었던 '역사수정주의'가 대중운동을 넘어서 체제 차원에서 전개된 시기이기도 했다. '재일 특권을 용납하지 않는 시민모임' 같은 배외주의 단체도 준동하였고, 지상파 방송을 통해서도 혐오 발언이 돌출하며, 역사교과서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라져 갔고, 국수주의 정치조직 '일본회의'는 국회의원의 상당수를 배출했다. 물론 이러한 '우경화'는 정치세력의 의도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일본 경제의 약화,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군사력 강화, 한국의 '추격·추월', 북한의 '·미사일 위협' 등 여러 요인 속에서 일본의 사회심리가 '우경화'의 방향으로 움직여간 면이 있다. 2000년대의 대대적인 '북한 때리기', 2010년대의 '협중', '혐한' 현상 역시 그 산물이다.

이 와중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 및 군함도(端島)의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둘러싼 마찰, 2015년의 어이없는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 2018년의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관련 대법원 판결, 이듬해 이에 반발한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 조치, 다시 이에 반발한 한국 측의 '노 재팬(No Japan)',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GSOMIA) 연장 중단 등의 사태가 이어지며 양국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코로나19 팬데믹이 덮치면서 수년간의 냉각기를 맞게 된다.

 

 

한일 문화교류의 확대, '3의 영역'의 확장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양국은 정치경제 면에서 상당 기간 협력관계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문화, 특히 대중문화 분야는 '왜색'의 이름으로 배제되었다. 이러한 관계에 변화가 일어난 것 역시 1990년대였고, 21세기 이후 문화교류는 전면화된다. 또 일본문화가 거의 일방 유입되었던 이전과 달리, 한일 양국의 문화가 쌍방 교차하는 대등한 교류, 일부 소수가 아닌 대중적 차원에서 즐기는 교류로 바뀐다. 지난 수십 년간, 얼마나 교류가 늘었는지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이 필요없다. 역사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 빈발했던 2010년대에도 교류는 계속 확대되었다. 특히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관광객 수는 확대일로를 거듭, 2018년 한국인의 일본 방문 754만 명, 일본인의 한국 방문 295만 명으로 도합 1000만 명을 훌쩍 넘어섰고, 코로나19 팬데믹 종료 후인 2024년에는 이 기록을 뛰어넘어 한국인의 일본 방문 882만 명, 일본인의 한국 방문 322만 명으로 도합 1200만 명을 넘어섰다. 젊은 세대일수록 서로의 문화를 즐기는 것은 일상이 되었고, 양국의 문화가 뒤섞이는 융합의 사례들도 빈발한다.

이러한 상황은 <교류(交流)공유(共遊)공감(共感)의 경향 확대> 라고 요약할 수 있다. 굳이 한 단어로 바꾸자면, 교유(交遊)의 영역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또 이 영역의 상대적 자율성이 증대되었다. 가령 2000년대 중반까지도 '다케시마의 날' 제정을 둘러싸고 지자체 및 문화교류가 중단되기도 했다. 그러나 '노 재팬' 때에는 정치경제나 역사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더라도 문화교류는 별개라고 간주하는 흐름이 커졌다. 관광이나 문화는 성격상 '친일/반일', '가해/피해'의 틀에 얽매이지 않는 영역으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양국 간에는 이러한 '3의 영역'이 형성되었고, 나날이 확장되고 있다.

 

 

양국관계의 우여곡절을 넘어

 

이처럼 확장된 교유를 통해 국가 간 갈등이 완화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는 의견들도 나왔다. 일리 있는 말이다. 대중문화, 소비문화를 통해 막연히 상대국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가, 언어도 배우고, 나아가 역사와 문화, 정치와 경제까지, 상대를 더 깊이, 제대로 알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런 이들이 늘어날수록 양국 간의 가교도 튼튼해지는 셈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정치경제나 역사 문제가 자동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본적으로 각 분야의 문제는 각 분야의 논리로 대응해야 한다. 가령, 해방 8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60주년을 맞게 된 세월 내내, 우리 마음 속에서 쉽사리 가시지 않는 역사 문제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우리로서는 일본 측의 말끔하고도 진정성 어린 사과와 반성 표명, 그리고 그에 기초한 신뢰와 협력이 기대하는 바일 것이다.

그러나 30년 전의 J에 못지 않은 관념들이 사회의 저변에 번져 가며 형성된 일본의 사회심리적 지형과 현실정치의 장벽들은 이런 기대를 쉽사리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1965년에 체결된 한일 기본조약부터 식민지배에 대한 양국의 해석이 합법과 불법으로 상반되었음도 물론이다. 결국, 기존의 일본 총리대신의 '사죄와 반성' 표명 담화를 형식적으로 유지하는 수준에 머무를 것이다.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수상은 아베 못지않게 안보·국방 문제에는 적극적이지만, 아베와 달리 과거사에 대해서는 직시하고 확실히 해소하고 넘어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지지 기반도 취약하고, 아베 정권하에서 구축된 틀을 넘어서기 쉽지 않다. 823일의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역사 인식에 관한 역대 내각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계승하고 있음을 언급"하는 것에 머물렀다(한일 정상의 공동 언론발표문).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월 동안 우왕좌왕했던 한일관계를 되풀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최근 10년간만 보아도 한편으론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 없이는 정상회담도 않겠다는 초강경책이나, 전 국민이 분기하다시피했던 '노 재팬'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어이없는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합의', '한 잔의 물컵'에 먼저 절반을 채워 주고 보는 '담대한 양보'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대응한들 일본의 입장에는 별 변화가 없었다. 이런 경험을 밑거름 삼아 한일관계를 더욱 냉철하게 보고, 좀 더 의연하며 평정심을 잃지 않는 길을 가야 한다. 역사의 아픔은 충분히 연구하고 가감없이 기록하며, 적절한 방식으로 교육하고, 또 상대에게든 제삼자에게든 필요시 차분히 설명하고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목소리를 높인다고 상대가 변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지만, 쉽게 체념하고 포기할 일도 아니다. 자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양국은 저출산 고령화, 인구감소, 지방소멸, 기후변화, 에너지, 식량, 안전보장, 통상, 미래기술 등 각종 분야에서 서로 참조하고 협력할 과제가 산적해 있으며, 최근 들어 유동하는 세계정세는 이에 더하여 새로운 고민들을 계속 안겨 주고 있다. 사회와 문화의 각종 영역에서도 현재와 같은 교유를 확장하며, 다양한 상생의 길을 찾을 수 있다. 더욱 긴 호흡으로 내실을 다져 가는 가운데, 해방의 의미를 확충하고, 양국관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기회도 다가올 수 있을 것이다. 10년 후, 해방 90주년, 한일 국교정상화 70주년의 모습은 어떨지, 기대해 본다.

 

* 지난 97일 이시바 총리는 전격 사임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글을 포함한 이번 기획의 글들은 그 이전에 집필되었습니다. 이 점 읽는 분들의 양해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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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운(한림대학교 일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