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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 '화해'와 '공생'의 틈새에 낀 재일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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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5-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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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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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혁명'의 불청객

2025년 여름, 필자는 '빛의 혁명'을 자처한 이재명 대통령 국민취임식에 재외동포청 초청으로 참석하였다. 일본 관서(關西) 지역의 2·3세 재일동포들과 함께 광화문 자리에 앉았다. 우리 옆자리에는 중국 국적 동포들이, 앞뒤로는 미국, 유럽 등지의 재외국민들이 함께했다. 태극기 물결과 "대한민국 만세의 열기 속에서 필자는 묵직한 이질감을 느꼈다. 이 자리에 모인 재외동포들 사이에는 확실히 서열이 매겨져 있다고.

그 순간, 지난 30여 년간 수도 없이 들었던 불쾌한 질문 하나가 떠올랐다. "민단인가요, 조총련인가요?" 말투는 공손하지만, 그 물음의 저의는 늘 무례하다. 초면에 정치 성향을 캐묻는 몰상식함을 무릅써서라도 재일동포에게는 꼭 물어 봐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관계를 맺을지 여부를 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냐"라는 물음이 초면에 던져지는 일은 이제 일상이 되었지만, 처음에 겪었을 때 받은 충격이란 말똥을 얼굴에 얻어맞은 것 만큼이나 더러운 기분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이처럼 재일동포는 한국 사회가 유일하게 '정치적 의심'을 정당하게 투사하는 존재이다. 어떤 식으로든 응답하지 않는 한, 의심을 불식시킬 수 없다. 철저히 ''과 얽히지 않는 삶을 살아온 이들도 마찬가지다. 개인의 삶의 무게 따위는 의미를 지닐 수 없다. 가히 폭력적이다. 분단과 냉전, 그리고 반공 체제에 기반한 국민국가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의 직접 피해자인 재일동포에게 냉담하거나 멸시적인 태도를 취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들은 해방 후에도 해방되지 못한 재외동포 집단이다. 한일 수교의 직접적 당사자였음에도. 나아진 일 없이 국경 사이에 떠 있는 존재로 남아 있다. 광복 80주년과 한일 수교 60주년이 겹친 2025, 축하의 자리에서도 여전히 '끼어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남북한과 일본 세 개 국민국가 안에서, 그리고 이들 간의 관계성에서 말이다.

이 같은 문제의 원인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재일동포의 현재를 통해, 이들을 주변화시켜 온 한국 현대사의 구조적 문제를 말이다. 재일동포의 역사는 대한민국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잊히거나 예외화될 수 없는 이 역사 속에서만 국민국가 대한민국의 본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문제의 기원과 구조: 경계에 선 재일동포의 삶

 

 

식민지 청산의 좌절과 분단의 심화

 

재일동포 문제의 근저에는 일제강점의 불완전한 청산이 있다. 일본은 패전 직후 일본 내 조선인을 일방적으로 '외국인'으로 규정하며 국적자로서의 지위를 박탈했다. 강요된 이주의 역사를 무마하고 제국주의적 지배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에서였다. 1948년에 성립한 한국 정부 또한 이들을 온전한 국민으로 포섭하기보다는 분단 체제 속에서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바라보았다. 1949년에 제정된 재외국민등록법은 이를 제도화한 것이다.

1965년 한일 수교는 재일동포의 권익을 제고할 기회였으나, 양국 정부는 재일동포의 특수성을 외면하고 국가 간의 이해관계를 우선시하는 기조를 고착화시켰다. 이때 체결된 재일한국인 지위협정은 이들에게 단지 일본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만을 보장하는 데 불과했다. 그마저도 한국 재외국민 등록을 필하는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유독 재일동포 문제에 있어서는 한일 간은 이토록 긴밀하게 협업을 잘해 왔다. 이 같은 정치적 접근으로 인해 재일동포의 권익문제는 별로 나아질 게 없었다. '기민(棄民)정책'이라는 동포들의 원성과 비난의 화살이 향한 곳은 말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정부였다.

놀랍게도 재외국민의 국내 처우 관련 법제도는 1990년대 초만 해도 전무나 다름없었다. 주민등록번호 없이 한국사회에서 살아가야 했던 국민이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을까. 1968년에 도입된 주민등록증이 ''이 아님을 증명하는 인식표 역할을 담당케 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는 점을 감안할 때, 번호가 없다는 것은 곧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동포를 향한 한국사회의 시선은 이처럼 제도에 의해서도 강화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선 공약으로 재외국민용 주민등록제도가 마련되었지만, 굳이 내국인과 별도 제도를 제정해야 했던 이유는 재외국민의 국내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다. 재외국민은 거주국에서 권리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에서 비롯된다. 한국 정부의 이같은 접근방식이 일본에서 '무권리의 외국인'인 재일동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제 짐작이 갈 것이다.

 

 

냉전과 반공 체제의 이분법적 사고 틀

 

한국은 건국 초기부터 반공 이데올로기를 국시(國是)로 삼았고, 이는 재일동포를 이념적 잣대로만 규정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재일동포는 '빨갱이'로 낙인찍히거나 '불순자'로 의심받는 이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이러한 사고 들은 재일동포 사회의 현실과 크게 괴리된다. 최대다수는 민단이나 조총련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은 '중간층'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어느 한 쪽에도 경도되지 않은 채 일본 사회에서 개인으로서 시민적 접근에 의해 정체성을 지키며 공동체를 지탱해온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한국 정부는 이 중간층의 존재 사실을 외면하고, 재일동포 사회를 늘 민단과 조총련이라는 두 대립 구도로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왜곡된 인식은 정책 설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동포 사회의 복잡한 실상을 담아내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독재 정권 시절, 재일동포는 반공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120명 또는 160명으로 추정되는 2세 청년들이 모국에서 '정치범' 혹은 '간첩'으로 조작되어 감옥에서 고초를 겪다가 민주화 이후 노인이 돼서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잇따라 받고 있다. 이들 중대다수가 '중간층'에 속하는 이들이다.

 

 

제도적 소외와 정체성의 이중적 딜레마

 

1990년대 이후 재외동포의 다국적화와 교류와 환류가 시작되면서, 재외동포 정책은 곧 재일동포 정책이라는 등식은 더 이상 성립되지 않는다. 1999년 제정된 재외동포의 출입국과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재외동포법)은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이 법은 재외동포를 국적을 기준으로 '재외국민''외국국적동포'로 양분화하고 이들의 국내 지위를 규정한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재일동포는 유일하게 태생적으로 주민등록번호 발급 이력이 없는 '재외국민' 집단이다. 게다가 이 상태가 영속적으로 지속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주민등록번호 발급 이력이 있는 여타 재외국민들과 단일 범주에 묶여 있다. 그런데 재외국민등록에 벌칙조항이 없어 재일동포 외 재외국민은 굳이 재외국민등록을 필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점에서 재외국민등록을 필해야만 여권을 발급받을 수 있어, 제도에 엄격하게 구속되는 재일동포와 차등이 일어난다. 한편, 병역법 개정으로 재외국민 또한 국내 거주 시 병역을 이행해야 하는 등 의무 측면에서는 내국인과 동일해졌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이러한 '2등 국민' 지위는 권리의무 간의 심각한 불균형이 제도적으로 뒷받침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법적, 제도적 한계는 재일동포의 삶에 직접적인 피해를 낳고 있다. 재일동포 3세로 한국 국적을 유지하며 22년째 국내에서 인형극단을 운영해 온 고규미 씨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예술인복지재단으로부터 창작 지원금 환수 및 5년간 사업지원 제한 조치를 통보받았다. 재단 측은 그가 '재외국민'이라는 이유를 들어 심사를 거쳐 지급한 지 5년이나 지난 시점에 이 같은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2018년 재일동포가 국내 육아지원사업에서 배제된 데 대해 헌법재판소가 "국내 장기 거주 재외국민은 일반 국민과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보건복지부의 배제 조치는 위헌이라고 판시한 사건과 흡사하다. 이처럼 같은 구도의 행정차별이 또다시 그리고 앞으로도 일어날 수밖에 없는 구도가 유지되는 한, 재일동포는 줄기차게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행정소송을 제기한 고 씨는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고 살아 왔는데, 갑자기 투명인간이 된 기분"이라며, 모국으로부터 받은 차별과 배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2025911일 재단은 고 씨에게 처분 취소를 통보함.)

이러한 제도적 모순이 비극적인 결과를 낳은 사례도 있다. 서울의 한 사립대에 재학 중이던 재일동포 4세 학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다. 해당 대학은 한국 국적을 가진 재외국민 학생에게 외국인 유학생보다 높은 내국인 학생 기준을 졸업요건으로 요구한다. 학점을 모두 채운 이 학생이 만약 중국동포처럼 외국 국적을 가졌더라면 졸업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정체성의 근거로 지켜온 한국 국적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 제도란 누락된 존재에게 이토록이나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고려가 필요하다.

 

 

재일동포 문제와 한국 사회의 과제

 

재일동포의 존재와 역사는 한국 사회의 인식보다 훨씬 깊게 대한민국 현대사에 관여해 왔다. 이들은 한국전쟁 참전, 9개 주일 한국공관 기증, 구로공단을 비롯한 산업단지 투자, 신한은행 설립, 포스코 건설의 가교역할 등 한국 현대사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제주도 감귤 농사 정착과 학교 운영 등 교육 분야에서도 역할을 담당했으며, 88 서울올림픽 성금과 IMF 외환위기 시 엔화 송금 등 경제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주연급' 기여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존재는 오늘날 한국사 주류에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 나라의 가난과 초라함을 상기시키는 재일동포를 자국 정체성 서사에서 의도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지우려 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군사독재 시절, 조국에서 정체성을 찾으려던 재일동포 2세 청년들이 '간첩'으로 조작되어 고초를 겪은 사건은 재일동포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때 굳어진 이들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의심과 경계는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1972'7.4남북공동선언'이 촉발한 자생적 민족 교육에 대한 한국 정부의 개입과 방해 역시 흑역사로 남아 있어 재일동포들의 불신을 낳았다. 그럼에도 이들이 구사하는 어눌한 한국어는 한국 사회에서 가차 없는 질타의 대상이 된다. 거주국 정부의 탄압으로 한국어 사용이 어려운 고려인 동포에게 보이는 연민과 '동포애'와는 매우 대조적이다. 이러한 모순적 태도 역시 일제강점, 분단, 냉전 구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역사적 성찰과 새로운 공존의 과제

 

광복 80주년과 한일 수교 60주년이 교차하는 2025, 재일동포의 역사는 한국 사회에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들에게 '해방'은 모국으로의 귀환이 아니라 분단의 문제였고, '수교'는 배제와 주변화를 굳혀 나가는 출발점이었다. 재일동포 문제의 핵심은 한국 정부가 이들을 오로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인식한 데서 비롯된 총체적인 정책 실패에 있다. 이는 또한 한일 양국이 자국의 국민국가 서사 속에서 재일동포를 의도적으로 주변화하고 소외시킨 공범 관계의 산물이기도 하다.

재일동포의 역사는 일개 재외동포사회의 일화가 아니라, 일제 식민지배·남북 분단·냉전이라는 한국 현대사의 첨예한 문제들이 응축된 현장이다. 특히 이들이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 준 헌신은 한국을 식민 지배했던 일본에서 건너온 동포에게 의지해 한국 사회가 성장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로 이 '치부'를 은폐하려는 충동이 재일동포를 '수치스러운 존재'로 취급해 온 근본적 이유일지도 모른다. 기억의 은폐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재일동포는 한국 현대사의 한 축을 구성하며 한국의 국가 정체성에 깊은 의미를 부여해 온 존재이다.

따라서 국민국가 대한민국과 재일동포 간의 진정한 화해는 단순한 역사 인식이나 감정적 반성만으로 이루어 낼 수 없다. 법적·제도적 개선을 통해 불명예스러운 이들의 지위를 실질적으로 개선해야만 한다. 재일동포는 거주국과 모국 양측에서 시민적 권리를 온전히 보장받지 못하는, 전 세계적으로 보아도 보기 드문 특수한 지위에 놓여 있다. 이들에게 간절한 것은 모국의 '특혜'가 아니라, 평범하고도 평등한 처우이다. 이주의 시대에 수많은 한국 청년들이 일본을 비롯한 해외에서 활동하듯, 재일동포 청년들 역시 모국에서 자유롭게 역량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하는 일이야말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다. 과거의 불행한 관계를 미래 세대에게 되물림하지 말 것,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미래지향적 접근'이며, 한국 사회의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화해와 공생의 길을 여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이번 광복절에는 사상 최초로 재외동포를 위한 대통령 메시지와 더불어 재일동포만을 위한 별도 메시지도 발표되었다. 이어진 방일 시 열린 동포간담회에서는 정치범 피해자에 대한 대통령의 공식 사죄도 이어졌다. 희망의 ''이 이제 비추어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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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웅기(한림대학교 일본학과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