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2기 시대, 러시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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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고관리자
- 2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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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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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진행 중인 트럼프2기 정권의 대(對)러시아 접근을 의아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트럼프에 대해 심지어 “러시아의 고정 간첩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 이들도, 적어도 서구에는 적지 않다. 그만큼 트럼프는 러·우 평화 회담을 주선하는 과정에서 친러 편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더군다나 지난 2월 28일에는 쇼맨십이 강한 트럼프가 우크라이나의 대통령 젤렌스키를 노골적으로 모욕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함부로 대하는 것을 수백만 명의 세계인들이 생중계로 지켜보기도 했다.
트럼프와 소련 내지 러시아의 첩보기관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로서는 당연히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굳이 그런 확인이 불가능한 추측에 기대지 않더라도, 트럼프2기 대외정책의 편향성은 미국의 이해관계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 있다. 미국이 모든 방면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했던 2008년 이전의 세계였다면, 친서방 국가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를 몰아세우는 데에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한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범할 수 있었다는 것도, 결국 이와 같은 미국의 절대적 우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2020년대의 새로운 세계 정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국력의 기반인 제조업으로 본다면 세계 제조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중국의 절반에 불과하다. 호주 싱크탱크 호주전략정책연구소(ASPI)에 의하면, 64개 핵심 기술 분야의 90%에서 최근 5년간 미국이 아닌 중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밝혀진 사실이지만,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 지원용으로 생산하는 포탄은 연 120만 발 정도로, 러시아의 3분의 1보다 약간 많은 수준에 불과하다. 포탄 생산의 대국인 북한까지 러시아에 가세할 경우, 러시아는 서방과의 대포전(戰)에서 확실히 이기게 된다. 이처럼 2008년 세계 공황 이전의 절대적 우위를 이미 잃고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가 된 미국은, 러시아와 같은 세계체제 준주변부의 국가들을 더 이상 손쉽게 제압하거나 대리전의 대상으로 여길 수만은 없게 됐다. 준주변부의 신흥세력들 중에서 적어도 하나를 선택해 화친(和親)을 맺는 것이, 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극히 논리적인 결정으로 보인다. 트럼프 특유의 저돌적이고 약소국에 모욕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아마 민주당이 대선에서 이겼더라도 결국 미국은 대러 관계 정상화에 나섰을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러시아인가? 일단 중국과 달리 러시아는 미국과 무기 수출 등 일부 분야 이외에는 직접 경쟁하지 않는다. 첨단기술도 그렇고, 중국의 위안화와 달리 어차피 미 달러를 밀어내 세계 기축 통화가 될 확률이 없는 러시아 루불화도 그렇다. 그러면서도 러시아는 ‘위치’와 ‘자원’이라는 천연 자산이 있다. 혹시나 미·중의 대립이 무장 대치 내지 무력 충돌로 치달을 경우, 러시아는 중국의 ‘후방’이 되어 중국에 대륙 루트를 통해 어떤 자원들이 공급될지 결정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을 것이다. 일단 미·러 관계가 개선될 경우 중국이 이 점을 감안하여 대미 대립의 극단화보다 중도 타협을 선호할 확률 역시 높아질 것이다. 그와 동시에 미·러 화친은, 서구 기업들이 이미 철수하고 중국 기업들은 아직 본격적으로 들어오지 않은 러시아 자원 채굴 시장으로 미국 기업이 진입할 가능성을 높인다. 또한, 기후 온난화로 북극 극지 지역의 광물 채굴 문제 등이 제기되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57척의 쇄빙선을 보유하는 러시아는 5척밖에 보유하지 않은 미국에게 매우 희망적인 파트너가 될 수 있다. 즉, 트럼프가 과거 소련 내지 러시아의 첩보 기관들과 어떤 관계를 가졌는가를 떠나, 대러 화친 정책은 나름대로 잘 계산된, 미국 국가와 자본의 이해에 기반한 전략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과 화친을 맺을 경우 러시아는 과연 중국과 ‘손절’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일단 러시아의 전체 수입에서 중국산 상품이 차지하는 비율은 이미 40% 가까이에 이른다. 중국과의 무역을 빼고 러시아의 경제적 생존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현재 러시아는 중국과의 우호 관계를 바탕으로 4,209km나 되는 기나긴 중·러 국경에 그다지 큰 병력을 배치하지 않고 있으며, 그로 인해 우크라이나 침공 등 대서방 군사 작전을 수행할 여력이 생긴다. 하지만 대(對)중국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된다면 러시아는 병력을 원동으로 재배치하는 등, 지금까지 취해온 대(對)서방 공세 전략을 완전히 포기해야 할 것이다. 즉, 미·러 관계가 크게 개선되어도 러시아는 대(對)중국 선린 관계의 관리에 큰 공을 들일 것이고, 아마도 중국에 대한 그 어떤 적대 행위도 자제할 것이다. 결국 미국이나 중국보다도 인구·경제·기술 면에서 취약한 러시아는 ‘캐스팅보트’로서의 위치를 이용하여 양쪽에서 보다 좋은 교역 조건을 따내려는 ‘양다리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보인다. 이게 바로 북한이 1960년대 이래 북경과 모스크바 사이에서 취해온 실리 전략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국에게 미·러 화친은 어떤 함의를 갖게 될까? 최근까지 지원했던 우크라이나를 용도가 폐기된 도구처럼 버리고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를 택한 미국의 행동은, 그 어떤 동맹도 궁극적으로 늘 가변적이라는 사실, 즉 절대시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언제 미국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조건이 바뀔지 모를 한미 동맹을 위해 중국 등 지역 국가들과의 관계를 해친다는 것은, 결국 허무맹랑한 자해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국익을 바라보는 미국 지도층의 시각이 바뀌면 한미 동맹도 언제든지 상대화될 수 있지만, 지역 이웃들과 한 번 상처난 신뢰 관계를, 나중에 복구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한데 미국의 하위 파트너로 어차피 지금까지 남아 있고 아마도 당분간 남을 한국의 상황을 고려하면, 미·러 화친은 한국에게 운신의 폭을 넓힐 기회를 제공할 가능성도 있다. 한국은 2022년2월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대러 제재 대부분을 준수해야 했는데, 제재가 완화되면 다시 러시아에서의 현지 생산을 재가동하고 키르기스스탄 내지 카자흐스탄을 통한 우회 무역이 아닌 대러 직접 무역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우회 무역에는 추가 비용과 여러 불편사항들이 뒤따르는 만큼 한국 기업한테는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동시에, 미·러 접근이 성공을 거두고 상당히 진전될 경우 그 기회를 틈타 미국과 한국이 러시아의 혈맹이 된 북한에 접근하여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을 위한 대북 외교를 펼칠 수 있다. 즉 미·러 관계 정상화는 한국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단, 그렇다고 해서 지금 러시아를 통치하고 있는 푸틴 독재 정권의 군사주의적 면모나 인권 탄압, 이웃 약소국에 대한 국제법 위반 행위 등에 결코 눈을 감아서는 안 된다. 러시아를 파트너로 삼는다 해도, 러시아의 현재 정권을 현실 이상으로 미화할 필요는 절대 없다. 국가 차원에서는 독재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러시아의 야권(野圈), 러시아의 수천 명의 양심수를 당연히 지원할 수 없지만, 이 역할은 한국 시민 사회가 담당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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