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언어가 흩날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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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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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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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예고없이 찾아온 손님은 낯설다. 그날 저녁 세계를 강타한 소식이 그랬다. 황망했다. 몇 초간 머리를 떠돌던 반문(反問)이 사라지자 곧 탄성으로 바뀌었다. 노벨문학상이라니! 언론조차 당황했다. 모든 신문이 헤드라인을 바꿨고 방송사는 수상자의 영상 흔적을 찾아내느라 법석을 떨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대 경사에 어수선하고 들뜬 밤이었다. 웹진과 유튜브에 푹 빠진 젊은 세대는 저 멀리 밀어낸 문학에 약간의 미련을 표했을 테고, 기성세대는 문학과 함께 방황하던 젊은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노벨문학상이란다! 신채호의 표현을 빌자면, ‘6.25 전쟁 이래 제일 대사건’이라 할 만하다. 아사달과 아사녀가 달밤에 손잡고 춤추는 그런 환희였다. 문학상이라서 의미는 더욱 빛났다. 생리의학상, 물리학상, 화학상은 문명을 이끄는 과학적 동력이라면, 문학상은 인류의 보편적 고뇌를 비추는 정신 미학이다. 한국문학이 21세기 세계인의 중추신경을 건드리고 감전(感電)시켰다는 것이 문학상의 진수다. 드디어 문화대국의 반열에 올랐다. 궁핍한 환경 속에 살아가는 이 땅의 시인과 소설가들, 혼(魂)을 가꾸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내리는 ‘인정(認定)의 만나’가 아닐 수 없다.
독자들은 질문한다. 왜 한강 작가인가? 한국은 인구수에 비해 수많은 작가들이 떴다 졌다. 다른 예술에 비해 유독 문학이 차고 넘치는 나라였다. 지금은 비록 과학에 자리를 내줬지만, 1970년대까지 시대정신을 이끌어 왔던 화두와 사상의 편린이 문학에서 나왔다. 작가는 사상가로 통했다. 식민시대와 전쟁의 상처를 문학으로 견딘 선배 작가들이 노벨상의 토양을 이룬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 줄기에서 새로 뻗은 가지에 한강 작가가 있고 스웨덴 한림원은 그녀의 작품에서 인간의 본능적 고통을 발견했다. 그것은 한국에 국한된 것은 아니고 모든 인간의 운명과도 같은 보편적 질곡이다.
거북하고 불편한
설렌 밤을 보내고 동네 책방에 갔다. 기회를 놓쳤다고 후회하는 책방 주인의 말투에도 기쁨이 묻어났다. 창고에서 한강 소설 여섯 권을 겨우 찾아내 진열했는데 문을 열자마자 60대로 보이는 여성이 몽땅 사갔다고 했다. 그런데 점심시간에 그 여성이 다시 와서 반품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읽기 힘들다’는 이유였다. 행복하고 평범한 시민이 구태여 고통의 축제 속으로 진입하고 싶지 않았을 거다. 마침 그때 40대 젊은 여성이 들렀다가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반품된 책을 품에 안았다고 했다. 억세게 운이 좋은 여성이었다. 아마, 그 40대 여성은 가슴을 조이며 독파했을 것이다.
필자의 친구와 동료들도 흐트러진 서가에서 한강 작품집을 찾느라 설레는 시간을 보냈다. 읽다가 말다가를 반복하다 급기야는 서가에 방치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사(敍事)를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강의 소설에는 이렇다 할 서사가 없다. 주인공은 쓸데없이 마음병을 앓는다. 정신질환이라 하기도 뭣하고, 신경쇠약이라 하기도 애매한 주인공의 언행을 따라가자면 독자도 감염돼야 한다. 정상인의 맨정신으로는 감당하기 힘들다.
거북하고 불편하기는 권력도 마찬가지였다. 감추고 싶은 역사적 상처, 애국과 구국, 반공과 안보 슬로건으로도 결코 은폐되지 않는 권력의 치명적 오류가 스멀스멀 살아나기 때문이다. 한국 현대사에 내장된 대량학살(genoside)의 현장이다. 그렇기에 2014년 문체부가 주관한 세종도서 보급 심사에서 『소년이 온다』가 제외됐고, 맨부커상 수상작 『채식주의자』는 문란한 성행위 묘사 때문에 청소년 유해 도서로 분류됐다. 권력의 시선으로 한강은 위험한 작가였다. 산에서 체포돼 해변에 내몰린 주민들이 기관총 소사에 쓰러지고 시체 더미를 덮친 바닷물이 붉게 물드는 장면에 이르러 독자들은 ‘왜 그랬을까?’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작품, 그걸 따라간 작가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작가 한강은 이미 『그대의 차가운 손』(2002)에서 각오했다. “내가 죽고, 내가 쓰는 소설과, 그 소설을 쓰는 나만 남는다.”
고통과 마주보기
그녀의 작품을 읽기 시작한 독자들이 당장 만나는 것이 ‘고통’이다. 이게 노벨상인가? 그렇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고통을 품고 산다. 그 기원을 알아도 벗어나지 못하는 마음의 감옥이다. 데뷔작부터 그랬다. “어둠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밤새 그의 머리맡을 서성이고 있었을 뿐이다”(
『붉은 닻』, 1994). 그 어둠의 근원은 가족이거나 생득적이다. 아름다운 연정(戀情)을 기대하게 하는 『여수의 사랑』(1995)엔 어릴 적 트라우마가 결벽증과 신경증으로 번진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가슴이 아리다. 계속 읽기에 버겁다. 책장을 덮어야 하나?
25세의 여성 작가는 ‘어느 곳에서나 보편적으로 우리들 삶의 원형에 똬리를 틀고 있는’(김병익, 해설) 아픔을 칼날처럼 선연하게 추적한다. 당시 57세의 문학평론가 김병익도 정신이 혼미해진다고 작품 해설에 고백했다. 오죽했으면 이렇게 썼을까. “‘여수의 사랑!’ 나는 마음을 냉랭하게 다잡고 속의 울림에 현혹되지 않기로 마음을 잡아 오직 작가에 대한 어떤 선입견도 버리고 오직 그의 작품에만 매달리기로 해 본다”라고.
정작 작가는 독자를 아리게 만드는 고통과 마주 보는 내력을 길러야 했다. 그래야 한 문장을 쓰고 또 나아갈 수 있다. 『소년이 온다』, 청사 복도에 널브러진 동호의 혼을 불러내 여기저기 다니다가 며칠 아팠던 작가다. 내력을 기른 흔적은 그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2013)에 보인다. 우는 아기에게 ‘괜찮아’라고 달래는 그녀, “아이의 울음이 그치진 않았지만/../서른 넘어야 그렇게 알았다/내 안의 당신이 흐느낄 때/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 ‘괜찮아’). 내 안의 당신은 트라우마를 겪는 뭇사람, 나는 그를 달래는 작가. 작가는 고통의 언어로 달랜다. “우연의 일치였겠지만/며칠 뒤부터 아이는 저녁 울음을 멈췄다.”(시 ‘괜찮아’). 작가가 선뜻 자임한 대리 고통으로 아이는 울음을 멈췄던 거다. 며칠 뒤에야. 치유의 문학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말했다.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 인간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시적 산문.” 개인적 트라우마에서 사회성으로 나아간 작품이 『채식주의자』(2004)다. 여성의 개성과 주체성이 가족 폭력과 사회적 통념에 의해 차단돼 광기로 표출되는 어둡고 처연한 언어 공간에 세계인은 전율했다. 고통은 인류사를 관통하는 전류다. 그 전류를 생성하는 작가는 어지간히 힘겹지만, ‘나를 죽인 그녀’는 이제 역사적 트라우마로 진입한다. 『소년이 온다』(2014)와 『작별하지 않는다』(2021)가 그것. 『채식주의자』 이후 10년이 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소년이 결국 왔다. 작가는 5.18에 죽은 열다섯 살 중학생 동호의 영혼에 빙의해 살륙현장을 떠돈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국가폭력의 기억을 체화한 두 주인공이 펼치는 고통의 축제가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간단없이 무너뜨린다.
5.18과 4.3은 상징일 뿐, 작가의 시선은 인간의 연약함과 숭고함이 겹치고 나뒹구는 그 풍경에 있다. 감추고 싶은 그 사건을 소환해 서사로 설정한 작가를 두고 이념적 성향을 비난하거나 고향의 내력을 들춰내고, 가족의 이력을 빚대거나 국가정체성을 들먹이는 세간의 풍조는 노벨문학상 수상국의 격조를 망가뜨릴 뿐이다. 그것은 세계에서 발생하고 있는 국가폭력과 이념 전쟁의 상징이다. 중요한 것은, 풍경 속에 엉킨 생존 욕망의 비열함과 죽음을 불사하는 찬란한 영혼을 캐내 불꽃처럼 발화하는 언어에 세계인들이 숨죽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눈』과 『흰』
고통 속으로 진입하는 작가의 힘은 어디에서 왔을까? 달래는 언어? 그렇다면 달램의 힘은? 『여수의 사랑』에서 『작별하지 않는다』에 이르는 긴 여정에서 작가 한강은 마음의 내벽을 쌓았다. 개인, 가족, 역사로 넘어가는 고통의 경로에 스스로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대의 차가운 손』(2002)엔 몸통은 텅 비고 손은 파손된 조각상에 치를 떠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질량이 없는 존재, 껍데기만 남은 존재의 강렬함에 전율한 작가는 ‘나를 죽이고, 소설을 쓰는 나만 남긴 채’ 가족 공간으로 나아간다. ‘내가 없는’ 나의 도강증(渡江證)을 받아든 작가는 자유로워졌다. 그러자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의미를 잃었다. 트라우마가 발산하는 죽음의 미학이 삶의 호흡과 뒤섞였다.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유혹이 절망적 고통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생성되는 순백색의 향연이 『흰』(2016)이다. 도강증을 받아든 작가는 성에와 서리, 새의 흰 날개, 하얀 입김, 흰 꽃에 한없이 끌린다. 그래서 눈(雪)이다. 눈은 역사적 트라우마로 절망하는 작중 인물들을 살려내는 막연한 축복이다. 눈은 고통을 흰색으로 덮는다. 실존과는 거리가 먼 우연한 강설(降雪)이 부조리한 실존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건져낸다. 이런 의미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200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튀르키예 작가 오르한 파묵(Orhan Pamuk)의 『눈(雪)』(2002)과 동형이다.
튀르키예 동부 국경지대 카르스라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갈등과 인종 탄압 속에서 히잡 소녀들의 자살이 빈발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세속주의의 충돌, 인종과 이단적 신념이 빚어낸 정치 폭력이 배후에 놓여 있다. 『눈』의 주인공 카가 나선 취재 여행길에 눈이 내린다. 인선의 부탁을 받고 제주에 내린 경하는 눈발 속에서 길을 잃는다. 눈은 절망과 고통을 흰색 으로 후려치는 자연의 향연이다. 두 작품의 시작과 끝엔 눈이 내린다. 가령,
버스가 출발한 직후, 창가의 그 사내는 ‘어쩌면 새로운 것을 볼 수 있을 거야’라는 기대에 차서 눈을 크게 뜨고 변두리 마을을 바라보았다.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 그저 눈 속에 파묻힌 가난한 마을의 거리, 허름한 단층집의 희미한 램프, 벌써 막혀 버린 먼 마을로 향하는 도로와 가로등이 보일 듯 말 듯 밝히는 절벽을 바라볼 뿐이었다.(『눈』)
속눈썹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손바닥으로 닦아 내며 나는 방향을 찾는다 … 일단 앞을 향해 걷기로 한다. 방향을 잃을 염려는 없다. 중산간 쪽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눈구름 덩어리를 향하기만 하면 된다. 너무 고요하다. 계속해서 이마와 뺨에 부딪혀 맺히는 눈의 차가움이 아니라면 꿈이라고 의식했을지 모른다. 어디에도 사람이나 차량이 보이지 않는 건 단지 폭설 때문일까? ... 검게 젖은 아스팔트로 매초마다 수천 송이의 눈이 내려앉아 사라지고 있는 횡단보도를 나는 가로지른다. (『작별하지 않는다』)
전자에서 화자(話者)는 카의 친구 오르한, 후자의 화자는 작가의 분신인 경하다. 오르한이 영화감독이라면, 경하는 주연배우이자 작가 자신이다. 작가 한강은 이 작품 이전에 『한 송이 눈이 녹는 동안』, 『작별』이라는 눈 연작을 썼다.
빛 조각을 잡아내는 표음문자
번역자는 ‘무한한 섬세함으로 고통과 감정의 바닥을 파고드는’ 문장을 번역하기가 난망했다고 고백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소년, 만나면 자신이 무너질 것 같은 소년, 그러나 ‘소년이 온다’를 데버라 스미스는 ‘Human Acts’로 번역했다. 의역이다. 『작별하지 않는다』에는 “작별하고 싶은, 작별하지 못하는, 작별해야 하는”의 여러 뜻이 중첩돼 있는데 정교한 불어판 『impossibles adieux』(불가능한 작별)마저 원의를 못 따른다. 표음문자의 위대함이다. 한글은 감성 문자다. 백여 가지도 넘는 인간의 감성을 명료히 포획하는 문자가 한글이다.
한국문학이 세계정신사에 입적했다. 그것도 한글을 가지고 말이다. 세종의 뜻을 받들어 정인지가 해례본에 썼다. 한글은 “바람 소리, 학 울음, 개 짖는 소리도 다 표기할 만하다”라고. 역사적 고통의 심연을 빛 조각처럼 분해하고 표현하는 한글의 힘을 스웨덴 한림원이 눈치챘다.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문학의 춤을, 고통의 축제를 한판 벌일 일이다.
* 중앙일보 10월 29일 자 칼럼 「광화문에서 문학의 춤을」을 수정, 보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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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호근(도헌학술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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