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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스러운 식물성의 세계를 직조하는 여성의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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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고관리자
  • 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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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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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Intro

2024년 10월 10일 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소식을 접했다. 흥분과 기쁨의 시간이 얼추 지난 후 필자가 먼저 한 일은 얼마 전 필자와 오랜 여성문학 연구 동료들이 7월 초에 펴낸 『한국여성문학선집』 7권을 펼쳐 목차를 확인한 것이었다. 선집의 7권에는 90년대 여성문학의 대표작들을 선별해 실었기 때문이다. 작가 한강의 존재를 문학 장과 독자들에게 강하게 각인시킨 소설 「채식주의자」는 창비 2004년 여름호에 발표되었고, 같은 제목의 소설집은 2007년에 발간되었다. 우리는 「채식주의자」의 작가 한강의 90년대 작품들에서 여성문학적 관점에서 쓰인 작품을 고르느라 꽤 고심했던 기억이 난다. 한강의 첫 소설집 『여수의 사랑』(1995)과 『내 여자의 열매』(2000)를 읽고 나서 선집에는 단편 「내 여자의 열매」(『창작과비평』, 1997년 봄호)를 수록했다. 비록 저작권 문제로 인해 전문을 싣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세계문학 장에 한강의 이름을 각인시킨 대표작들이라면, 작가의 문제의식, 특히 여성주의적 시각을 확인할 수 있는 출발점에 「내 여자의 열매」가 있다.


2. 식물-되기의 상상력과 한계

아래 ‘작가의 말’에서 볼 수 있듯이 「내 여자의 열매」에서 여성-인간이 식물로 변하는 상상력은 「채식주의자」에서 고통스럽게 펼쳐지는 식물적 상상력의 뿌리이다.


10년 전의 이른 봄, 「내 여자의 열매」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한 여자가 아파트 베란다에서 식물이 되고, 함께 살던 남자는 그녀를 화분에 심는 이야기였다. 언젠가 그 변주를 쓰고 싶다는 생각을 그때 했다. 10년 전의 내가 짐작했던 것과는 퍽 다른 모습이 되었지만, 이 연작소설이 출발한 것은 그곳에서였다. (작가의 말, 245쪽)


「내 여자의 열매」는 아내의 ‘식물-되기’의 과정을 남편의 시선을 따라가며 서술하고 있다. 서사의 표층만 놓고 보면 아내는 단순히 복잡하고 획일적인 아파트의 삶, 도시의 삶에 적응 하지 못하고 있다.


인구 칠십만이 모여 산다는 거기서 천천히 말라 죽을 것 같아. 수백 수천 동 똑같은 건물에, 칸칸마다 똑같은 주방에, 똑같은 천장에, 똑같은 변기, 욕조, 베란다, 엘리베이터도 싫어. 공원도, 놀이터도, 상가도, 횡단보도도 다 싫어.(『내 여자의 열매』, 문학과지성사, 2024, 17쪽. 이하 「내 여자의 열매」 작품 인용은 이 책의 쪽수를 따름.)


그런데 아내의 현실 부적응은 더 근본적인 데 원인이 있다. 아내는 “떠나서 피를 갈고 싶어”, “혈관 구석구석에 낭종처럼 뭉쳐 있는 나쁜 피를 갈아내고”(18쪽) 싶다고 반복해서 말하고, “자유롭게 살다가 자유롭게 죽는 것”을 꿈꾼다. ‘바닷가 빈촌’에서 평생을 보낸 어머니처럼 여성에게 주어진 삶에 순응하면서 살아가게 될까 봐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피’)을 완전히 부정하고자 한다. 하지만 모나지 않고 모든 것이 적당한 안정된 삶을 지향하는 남편은 그녀의 자유의지를 “어린아이 같은 것, 비현실적이고 낭만적인 몽상”(18쪽)쯤으로 여긴다.

정착을 꿈꾸는 남자와 탈주를 꿈꾸는 여자의 접점을 찾기는 어렵다. 아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남편은 무력하다. 푸른 멍이 점점 커져가는 아내를 보면서도 병원에 가라고 되뇌이는 것 외에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상황을 외면하는 동안 인간으로서의 아내는 생기를 잃고 푸석푸석 말라간다. 한곳에 머무르는 정주의 삶, 남편과 가족에 묶인 삶, 주어진 여성(성)의 역할을 거부하고 싶었지만 결혼 제도에 묶인 그녀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이 바로 아내의 역할과 장소로 주어진 아파트에서 거대한 식물이 되는 것이다.


어머니, 자꾸만 같은 꿈을 꾸어요. 내 키가 미루나무만큼 드높게 자라나는 꿈을요. 베란다 천장을 뚫고 윗집 베란다를 지나 십오층 십육층을 지나 옥상 위까지 콘크리트와 철근을 뚫고 막 올라가는 거예요. 아아, 그 생장점 끝에서 흰 애벌레 같은 꽃이 꼬물꼬물 피어나는 거예요. 터질 듯 팽팽한 물관 가득 맑은 물을 퍼올리며, 온 가지를 힘껏 벌리고 가슴으로 하늘을 밀어올리는 거예요. 그렇게 이 집을 떠나는 거예요. 어머니 밤마다 그 꿈을 꾸어요. (36쪽)


베란다와 옥상으로 이어지는 수직의 상상력, 현실의 강고함과 남성성을 상징하는 콘크리트와 철근을 뚫는 상상력은 꽤 도발적이다. 자라나고 뚫는 주체가 식물이기 때문이다. 이 식물은 “애벌레 같은 꽃”을 피우고, “맑은 물을 퍼올리”는 포용력과 생산성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식물-되기를 통해 아내는 “이 집을 떠나”고자 한다. 하지만 초월과 환상에 다름 아닌 이 욕망은 좌절된다. 

좁고 딱딱한 화분 속에 갇힌 식물-아내는 진딧물을 잡아주고, 새 흙으로 갈아주고, 물을 부어주는 따위의 남편의 돌봄을 통해서만 죽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여자의 열매」는 남편이 “내가 지상에서 가졌던 단 한 여자”였던 아내가 ‘한 웅큼의 열매’가 되자, 여러 개의 화분을 사서 열매들을 나누어 심는 것으로 끝난다. 

남편의 돌봄을 통해서만 식물로 살아갈 가능성이 있는 아내, 남편의 시선과 말을 통해서만, 그리고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서만 내면을 가늠할 수 있는 아내의 존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아내는 스스로 말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일까? 「내 여자의 열매」는 현실-동물성의 세계, 아내의 고통을 읽어내지 못하는 남편-가부장의 세계에 대한 비판을 스스로 말할 수 없음이라는 우회로를 통해 수행한 작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3. 채식주의, 수동적 저항

식물(성)의 상상력, 남편과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적 질서와 세계의 폭력성에 대한 거부는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를 잇는 주제이다. 「채식주의자」의 아내와 남편은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와 남편과 상당히 닮았다. 아내는 “특별한 매력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고, “평범한 아내의 역할”을 수행한다. 남편이 소시민적 삶을 지향하는 것도 닮았다. 

「채식주의자」는 이 두드러지지 않는 한 여성이 어느 순간 ‘육식’을 그치고 극단적인 ‘채식’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갈등하고, 끝내 정상 사회로부터 배제/추방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채식주의자」에서 아내 영혜는 모종의 꿈을 꾼 뒤 냉장고를 가득 채우고 있던 고기들을 버리고 채식을 시작한다. 그 꿈은 어두운 숲속을 헤매다 발견한 건물에서 시뻘건 고깃덩어리들이 매달려 있는 것을 발견하고 도망치지만, 끝내 날고기를 먹는 (피 묻은) 나의 얼굴을 발견하는 것이다.


내 손에 피가 묻어 있었어. 내 입에 피가 묻어 있었어. 그 헛간에서, 나는 떨어진 고깃덩어리를 주워먹었거든. (중략) 그렇게 생생할 수 없어. 이빨에 씹히던 날고기의 감촉이. 내 얼굴이, 눈빛이.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분명 내 얼굴이었어. 아니야. 거꾸로, 수없이 봤던 얼굴 같은데, 내 얼굴이 아니었어. 설명할 수 없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생생하고 이상한, 끔찍하게 이상한 느낌을.『채식주의자』, 창비, 2007, 19쪽. 이하 「채식주의자」 작품 인용은 이 책의 쪽수를 따름.)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은 육식, 동물성의 세계에 내가 순응해 왔음을 깨닫는 원체험에 다름아니다. 이 낯설고 끔찍한 세계의 기원은 어린 시절 아버지가 개를 죽이고, 자신이 그것을 먹었던 경험에서 비롯된다. 소설은 이 장면을 생생하고 끔찍하게 그린다.


(전략) 다섯 바퀴째 돌자 개는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줄에 걸린 목에서 피가 흘러. 목이 아파 낑낑대며, 개는 질질 끌리며 달려. 여섯 바퀴째, 개는 입으로 검붉은 피를 토해. 목에서도, 입에서도 피가 흘러. 거품 섞인 피. 번쩍이는 두 눈을 나는 꼿꼿이 서서 지켜봐. 일곱 바퀴째 나타날 녀석을 기다리고 있을 때, 축 늘어진 녀석을 오토바이 뒤에 실은 아버지가 보여. 녀석의 덜렁거리는 네 다리, 눈꺼풀이 열린, 핏물이 고인 눈을 나는 보고 있어. (후략) (53쪽)


이 길게 묘사된 잔인한 도살 장면은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다. 폭력적인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사회는 육식성과 공격성을 정상적인 것으로 표상해 왔다. 영혜 언니의 집들이 장면은 이 정상성을 가장한 세계가 어떻게 채식주의자인 식물성의 세계를 타자화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언니의 집들이에 모인 영혜의 가족들은 그녀의 채식을 비난하면서, 가족의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그녀에게 육식을 강요한다. 아버지가 딸의 입을 강제로 벌리고 고기를 밀어 넣는 행위는 영혜의 건강을 배려해서가 아니다.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 거다.”

(60쪽)라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가족이기주의에 기인한다.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아버지, 저는 고기를 안 먹어요.” 거듭되는 이 선언에서 주목할 단어는 “안 먹어요.”이다. 먹지 않겠다는 의지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문화에 대한 수동적 저항을 의미한다. 그다음 단계는 칼로 손목을 긋는 자해 행위이다. ‘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 다음에 이어지는 이 행위는 폭력으로 가득한 세계, 가족과 사회라는 이름의 공동체가 상식과 정상성이라는 명분으로 행사하는 규율 전반에 대한 거부로 읽어야 한다.

그렇다면 ‘내 여자’의 고통에 눈감았던 「내 여자의 아내」의 ‘남편’은 「채식주의자」에서 어떻게 변주되는가. “내가 고르고 고른, 이 세상에서 가장 평범한 여자”(26쪽)인 아내를 원했던 남편은 아내의 자해를 보고 ‘아내에 대한 혐오감’을 느낀다. 「내 여자의 열매」의 아내처럼 자신의 온몸을 드러낸 벗은 몸으로 햇살을 받는 아내를 남편은 “나는 저 여자를 모른다.”(64쪽)라고 부정한다. 결국 채식주의자가 된 아내는 아버지의 폭력, 남편의 부정 속에서 이 사회에서 추방당한다. (연작인 「나무불꽃」에서 영혜는 정신병원에 갇힌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이와 같은 추방의 이면에 감춰진 ‘먹지 않겠다’라는 수동적 저항을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소설 결말에서 그녀가 “젖가슴으론 아무것도 죽일 수 없으니까”(43쪽) 볼품없는 가슴을 드러내는 행위, 벌거벗은 몸은 남성 중심의 질서 잡힌 세계가 배제하고 억압해 온 것들을 회복하려는 윤리적인 몸짓이라 할 수 있다.


4. 폭력에 저항하는 고통스러운 식물 되기의 윤리

「채식주의자」는 남편의 시점과 영혜의 내적 독백이 교차되는 이중적인 서술로 진행된다. 「내 여자의 열매」도 아내의 내적 독백이나 편지가 남편의 시선 및 진술과 교차 서술된다. 남편의 시선과 진술로는 포착되지 않는 아내(여성)의 독백을 통해서만 우리는 식물-되기의 의미, 채식주의의 저항성을 비로소 파악할 수 있다. 더불어 정상성이라는 이름으로 은폐된 남성적 세계의 폭력성을 포착할 수 있게 된다. 이 고통스러운 읽기의 과정은 한국 현대사를 지탱해 온 폭력성을 독특하게 그린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탤릭체로 새겨진 유령(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사건의 진실을 들려주고, 독자들에게 현실 세계의 고통에 동참하라는 윤리를 일깨운다. 「내 여자의 열매」와 「채식주의자」에서 아내(들)이 힘겹게 들려주는 목소리는 이 윤리의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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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선(일송자유교양대학 교수)